23 윤영자(尹英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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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1980년 4월 18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김천시 평화동
열부(烈婦) 윤영자(尹英子) 50세

온갖 역경(逆境)과 싸워 가면서 알콜 중독(中毒)으로 폐인(廢人)이 되다시피한 남편(男便)을, 다시 새 인간(人間)의 길로 처음부터 걸음마를 시키고 있는 끈덕진 집념(執念)의 여인(女人)이 있으니, 그가 바로 윤영자(尹英子) 여사(女史)이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年前), 그에게 젖먹이 갓난애기와 2세(歲), 5세(歲)로 이어지는 어린것들이 슬하(膝下)에 있었는데, 이들 어린 것들에게 직업(職業)도 없이 매일(每日)같이 술타령만 하고 있는 그의 남편(男便)으로 인(因)해 굶는 연습(練習)을 시켜야 할 정도(程度)로 밥을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더 많았다. 

그런데, 그것뿐이면 또 참을 수 있었겠는데, 그나마 초라한 가재도구(家財道具)도 하나 남기지 않을 정도(程度)로 마구 때려부수는 것이 남편(男便)의 일과(日課)였고, 거기에다 아이들을 때리면서 학대(虐待)하는 일도 그의 나쁜 습관(習慣) 중(中)의 하나였다. 

가난은 날로 심(甚)해져 살림살이는 하루가 다르게 더욱 쪼들려만 갔고, 국수를 먹는 날은 생일(生日)날이라고나 할 만큼 이들 어린 식구(食口)들은 굶주림 속에서 눈물을 삼키며 성장(成長)했다. 

그러했던 남편(男便)은 끝내 알콜중독(中毒)에다 관절염(關節炎)까지 겹쳐, 바깥 출입(出入)도 할 수 없게 되어 그의 시중은 더욱 번거롭게 되었다. 

어디 그뿐이랴, 단칸 세방(貰房)살이도 기한(期限)이 넘어 쫓겨나게 되는 등 이중삼중(二重三重)의 고통(苦痛)이 그의 두 어깨를 짓눌렀지만, 이러한 곤경(困境) 속에서도 윤여사(尹女史)는 굴(屈)하지 않고 김매기를 비롯한 각종(各種) 농사(農事)일과 식모(食母)살이로 어려운 고비를 넘겨내는 한편, 남편(男便)의 병(病)을 고쳐주기 위해 한결같이 약(藥)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남편(男便)을 부축하여 하루에도 몇 차례씩 보행연습(步行練習)을 시키기도 했는데, 그의 정성(精誠)이 오죽했으면 그를 본 사람들이 "저 여자(女子)의 지성(至誠)은 하늘도 감동(感動)할 거야."라는 말로 찬사(讚辭)를 아끼지 않았을까. 

술은 무척이나 좋아하는 남편(男便)이었기에 하루 몇 잔 정도(程度)의 술도 매일(每日)같이 대접(待接)해 온 그는 "술 때문에 신세(身勢)망친 사람, 왜 또 술을 주는가."라고 주변(周邊)사람들로부터 힐책(詰責)도 많아 받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알콜 중독자(中毒者)는 술이 약(藥)이다."라고 말하면서, 남편(男便)에 대(對)한 서비스를 중단(中斷)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10년(年)이란 긴 세월(歲月)이 흘러간 지금, 남편(男便)은 윤여사(尹女史)의 눈물겨운 뒷바라지와 끈질긴 집념(執念)의 덕택(德澤)으로 이제는 혼자 힘으로 걸을 수 있게 되었고, 밤낮없이 주벽(酒 癖)으로 세월(歲月)을 보냈던 그 당시(當時)의 악몽(惡夢)도 차츰 지워 버리게 되었다. 행상(行商)으로 어려운 생활(生活)을 헤쳐 나가고 있는 윤여사(尹女史)는, 자신(自身)에게 주어진 운명(運命)에 도전(挑戰)하여 끝까지 운명(運命)을 개척(開拓)해 나가 아이들도 훌륭하게 키워 나가고 있으며, 아직도 완전(完全)한 건강(健康)을 되찾지 못한 남편(男便)을 위해서라도 10년간(年間)을 하루같이 봉사(奉仕)해 왔듯이, 어제도 오늘도 그의 눈물겨운 고투(苦鬪)는 이어지고 있다. 

"인내(忍耐)는 쓰다, 그러나 여기서 영근 열매는 한(限)없이 달콤하다." 바로 이 명언(名言)이야말로, 윤여사(尹女史))에게 적중(的中)되는 금언(金言) 중(中)의 금언(金言)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