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정보
본문
박두철씨(朴斗轍氏)는 일생(一生) 동안 양부모(養父母)를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으로 봉양(奉養)해 온 효자(孝子)인데, 국민학교(國民學校) 2학년(學年) 때 30여리(餘里) 떨어진 작은 집에 양자(養子)로 입양(入養)하게 되었다.
그가 입양(入養)한 숙부댁(叔父宅)은 산비탈을 개간(開墾)하여 겨우 끼니를 잊고 있는 가난한 농가(農家)로서, 그의 숙부(叔父)는 몸도 몹시 허약(虛弱)해 잔병 치레를 하는 것이 그날 그날의 일과(日課)였다.
매일(每日)같이 가난 속에서 살아온 그는, 그의 나이 14세(歲)때부터 지게를 지고 이웃집 품팔이를 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程度)로 삼촌댁(三寸宅)의 가난은 더욱 극심(極甚)하였다.
그런데, 그 후(後)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그의 친부(親父)가 중병(重病)으로 눕게 되자 약(藥)한 첩도 쓸 수 없는 형편(形便)이라 눈물로 하루하루를 지내오던 중 "맥뿌리"를 달여서 먹이면 완치(完治)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5년(年)이란 긴 세월(歲月)동안 10여리(餘里)나 떨어진 험준(險峻)한 산(山)길을 매일(每日)같이 오르내리면서 "맥뿌리"를 구(求)해다 드리는 등 그의 정성(精誠)은 놀랍기만 했는데, 마침내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으로 완쾌(完快)되는 기쁨을 맛 보게 되었다.
그 후(後) 건강(健康)한 나날을 보내던 부친(父親)은, 노환(老患)으로 불귀(不歸)의 운명(運命)을 맞기는 했지만, 그의 지극(至極)했던 효성(孝誠)은 하늘도 감탄(感歎)할 정도였다는 것이 주변(周邊)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그 날부터 친(親)어머님과 양부모(養父母)님을 모셔야 하는 막중(莫重)한 책임(責任)속에서, 그는 단 하루도 빠지는 일이 없을 만큼 매일(每日) 아침저녁으로, 30여리(餘里)나 떨어져 있는 양가(兩家)의 부모(父母)님께 문안(問安)을 드리는 정성(精誠)을 다했고, 밥상에는 하다못해 물고기 한 마리라도 차려 드릴 만큼 그의 효심(孝心)은 훈훈하고 따뜻하기만 하였다.
그런데, 또 다른 불행(不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쪼들리는 생활(生活) 속에서도 4남매(男妹)를 키우며, 그와 함께 생사고락(生死苦樂)을 같이해 오던 그의 부인(夫人)이 폐암(肺癌)으로 1972년(年)에 사망(死亡)하는 비운(悲運)을 맞게 되었다.
실의(失意)와 절망(絶望)속에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이번에는 우시장(牛市場)에 볼 일을 보러 갔던 그의 친부(親父)가 황소 뿔에 뜨여서 갈비뼈가 부러지는 중상(重傷)을 당(當)하여 2주간(週間)을 입원가료(入院加療)한 후 집에서 3개월간(個月間) 누워 있었는데, 그때 낮이나 밤이나 꼬박 곁에 지켜 앉아서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는 등 그의 지극(至極)한 간호(看護)는 누가 보나 눈물겨울 정도(程度)였다.
그의 효성(孝誠)에 오죽이나 극진(極盡)했으면 울릉도민(鬱陵島民) 모두가 그의 효행(孝行)을 알고 있을 정도일까. "아 그 사람 말인가? 양부모(養父母)의 생계(生計)와 약(藥)값을 마련하기 위해 열 네 살 때부터 지게를 지고 품팔이를 했던 소년(少年)말이지...하는 찬사(讚辭)가 섬 전체(全體)에 메아리 쳤겠는가.
효자(孝子) 집안에 효자(孝子) 난다고나 할까, 박(朴) 효자(孝子)의 효행(孝行)을 본받은 그의 자녀(子女)들도 효(孝)의 의미(意味)와 예(禮)의 참뜻을 실행(實行)하고 있음에, 마을에서는 이름난 효자(孝子), 효녀(孝女)로 칭송(稱頌)이 자자하다.
- 이전글제23회 독행상(篤行賞) 김옥녀(金玉女) 25.05.14
- 다음글제23회 독행상(篤行賞) 정옥분(鄭玉粉) 25.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