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박찬화(朴贊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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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1980년 4월 18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예천군 호명면
효부(孝婦) 박찬화(朴贊和) 51세

박찬화(朴賛和) 여사(女史)야말로 옛날에나 더러 있었던 비극(悲劇)의 여인(女人)이라고나 할까? 

그의 인생(人生) 출발(出發)은 너무나 기구(崎嶇)하기만 했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나이 불과(不過) 15세(歲)때 출가(出稼)했기 때문이다. 

15세(歲)면 중학교(中學校) 1~2학년(學年)에 해당하는 나이로서, 부모(父母)에게 재롱을 부리면서, 친구(親舊)들과 더불어 한창 뛰놀 천진난만(天眞爛漫)한 나이에 시집을 갔으니, 그의 인생(人生)에 비극(悲劇)이 뒤따를 수 밖에 더 있었으랴. 

친정(親庭)에서 자랄 때도 찢어질 정도(程度)의 가난만을 먹고 성장(成長)해 온 박여사(朴女史)는, 시집온 후(後)에도 또 가난만을 씹고 살아야 하는 곤경(困境)이다. 

시부모(媤父母)님과 시(媤)동생, 시(媤)누이까지 모시는 이중삼충(二重三重)의 고달픔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따라서 그는 시집오기가 바쁘게,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호롱불을 벗삼으면서 베틀에 매달려 일해야만 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시부모(媤父母)님을 지성(至誠)으로 모시는 일도 잊지 않았다. 

비록 그는 나이가 어리고, 겨우 한글을 읽을 정도(程度)의 무학자(無學者)이긴 했지만, 친정(親庭)에서 배워 익힌 대로 남편(男便)을 하늘로, 그리고 시부모(媤父母)님은 하늘의 하늘로 섬기면서, 진심(眞心)으로 공경(恭敬)했고 극진하게 지성(至誠)으로 봉양(奉養)했다. 

그런데, 뜻밖에 생긴 돌발사고(突發死故)로 박여사(朴女史)는 하늘이 내려앉는 듯한 절망감(絶望感)에 빠지기도 했는데 그것이 바로 6.25 사변(事變)때 참전(參戰)했던 남편(男便)의 전사통지서(戰死通知書)였다. 

그러니까 15세(歲)의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20년(年) 되던 꽃다운 청춘(靑春)에 과부(寡婦)의 몸이 된 것이다. 

꽃다운 나이에 청부(靑孀)이 된 그에게, 재혼(再婚)을 해서 새로운 인생(人生)을 찾으라는 주위(周圍)의 권유(勸誘)도 있었지만, 박여사(朴女史)는, 다시 가난과 싸우면서 시부모(媤父母)님을 극진히 봉양(奉養)하는 한편, 낮에는 논밭에서, 그리고 밤에는 베틀과 싸우면서 자립(自立)의 길을 닦아 나갔다. 

그러면서 그는 구두쇠도 놀랄 정도(程度)로 아끼고 또 아껴서 한 푼 두 푼 알뜰히 저축(貯蓄)했는데, 오죽했으면 하루에 국수 한 끼로 굶주린 배를 채우기도 했으랴.

그렇다고 해서 시부모(媤父母)님에게까지 배고픔의 고통(苦痛)을 드린 것은 아니다. 

비록 자신(自身)은 국수로 허기진 배를 달랠망정, 시부모(媤父母)님께만은 쌀밥을 대접(待接)할 만큼 정성(精誠)들여 봉양(奉養)하였다. 

티끌 모아 태산(泰山)이라는 말처럼 그의 힘으로 시(媤)동생과 시(媤)누이를 모두 결혼(結婚)시켰고, 얼마간의 논밭도 그의 노력(努力)으로 사들여 지금은 남부럽잖은 농가(農家)를 이룩하였다. 

시숙(媤叔)의 둘째 아들을 양자(養子)로 맞아들여, 손자(孫子)의 재송 속에 지금도 90 고령(高齡)의 시부모(媤父母)님을 모시고 있는 박여사(朴女史), 그의 비극(悲劇)도 이제는 끝났다는 것이 그를 지켜본 주변(週邊)사람들의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