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권남순(權南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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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1980년 4월 18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성주군 월항면
효부(孝婦) 권남순(權南順) 32세

권남순(權南順) 여사(女史)는 비교적(比較的) 부유(富裕)한 가정(家庭)에서 태어나, 부모(父母)님의 따뜻한 정(情)과 엄(嚴)한 가훈(家訓)속에서 성장(成長)하여 그가 24세(歲)되던 해에 결혼(結婚)하였다. 

차남(次男)인 남편(男便)에게 시집온 권여사(權女史)는, 시부모(媤父母)님을 비롯한 시숙내외(媤叔內外), 그리고 조카 등 10여명(餘名)에 달(達)하는 대가족(大家族)의 그늘에서 사랑을 듬뿍 받아가며 나름대로 행복(幸福)하게 살아갔다. 

그런데, 경제성(經濟性)이 비교적(比較的) 높다는 양송이재배(洋松茸栽培)가 천재지변(天災地變)으로, 하루아침에 실패(失敗)하는 바람에 이 가정(家庭)에도 암운(暗雲)이 덮기 시작했다. 

이로 인(因)해 가정(家庭)의 기둥 격(格)이었던 시숙내외(媤叔內外)가 화병으로 몸져 눕게 되었다. 

이 때 차남(次男)인 그의 남편(男便)이 둘만의 행복(幸福)을 위해서 분가(分家)해 따로 살자고 말했으나 권여사(權女史)는 "몸져 누워 계신 시숙내외(媤叔內外)가와 연로(年老)하신 시부모(媤父母)님을 놔 두고 그럴 수는 없다."고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拒絶)한 후, 남편(男便)은 설득(說得)시켜 전답(田畓)을 정리(整理)하여 부채(負債)를 갚아 버리는 등 사양(斜陽)길에 들어선 가정(家庭)을 재건(再建)하기 위해 전심전력(全心全力)을 기울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병석(病席)의 시숙내외(媤叔內外)의 간호(看護)를 위해 따뜻한 정성(精誠)을 다 쏟아 보살펴 주었다. 

다행(多幸)히 권여사(權女史)의 지극(至極)한 도움으로 그들의 건강(健康)은 회복(恢復)됐지만, 농지(農地)없는 농촌(農村)에서 살 수 없어 시숙내외(媤叔內外)와 조카들은 서울로 타향(他鄕)살이를 떠나게 되었다. 

이로써 차남(次男)인 그의 남편(男便)이 가정(家庭)의 기둥이 되어 시부모(媤父母)님을 모시게 됐는데, 얼마 후 그러니까 권여사(權女史)가 27세(歲)되던 해에 시부(媤父)님이 중풍(中風)에다 반신불수(半身不隨)로 의식(意識)을 잃은 채 자리에 눕게 됐다. 

바로 그때가 가난까지 겹친 최악(最惡)의 시기(時期)였지만, 그는 모든 것을 참고 시부(媤父)님의 병간호(病看護)를 위해 그의 따뜻한 정성(精誠)을 다 바쳐 봉양(奉養)했다.

극진한 그의 간호(看護)로 시부(媤父)님은 발병(發病) 15일(日)만에 의식(意識)은 회복(回復)됐으나, 반신불수(半身不隨)의 고통(苦痛)만은 해소(解消)시킬 수가 없었다. 

매일(每日)같이 반복되는 대소변(大小便) 처리(處理)를 위시하여 목욕(沐浴)시켜드리기, 옷 갈아입혀 드리기 등등 그의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은 눈물겨운 정도(程度)였다.

그런데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이번에는 시모(媤母)님께서 노망기(老妄氣)를 부리는 바람에 권여사(權女史)의 마음은 더욱 괴롭기만 했는데, 한 번은 눈이 쏟아지는 엄동설한(嚴冬雪寒)에 느닷없이 행방불명(行方不明)이 되어 밤을 꼬박 지새우면서 산(山)과 들을 헤맨 일이 있었는가 하면, 잠깐 집을 비운 사이에 성냥으로 짚더미에다 불을 질러 온 동리(洞里)가 소란(騷亂)을 피웠던 일등, 하나하나 열거(列擧)하면서 끝이 없을 정도(程度)로 그의 심신(心身)을 괴롭혔다. 

그럴 때마다 권여사(權女史)는 마치 갓난아기 다루듯이, 노망기(老妄氣)의 시모(媤母)님을 방(房)으로 모시고 가서 맛있는 음식(飮食)으로 분별(分別)없는 그의 노망기(老妄氣)를 잠재우곤 하였다. 

중풍(中風)인 시부(媤父)님을 보살피면서 한편으로는 제멋대로 설치는 시모(媤母)님의 노망기(老妄氣)도 잠재워야 했던 권여사(權女史)의 안타까움과 괴로움은 하느님이나 알아 줄까, 그가 겪었던 인간(人間) 고뇌(苦腦)를 어찌 말로 다 표현(表現)할 수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