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조태자(曺泰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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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1980년 4월 18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영용군 영천읍
효부(孝婦) 조태자(曺泰子) 32세

양가(良家)의 딸로 태어나서 소녀시절(少女時節)부터 예의범절(禮儀凡節)이 남달리 정중(鄭重)했던 조태자(曺泰子) 여사(女史)는 그가 19세(歲)때 결혼(結婚)을 하였다. 

시댁(媤宅)에 와 보니 시부모(媤父母)님을 비롯하여 7남매(男妹)의 많은 식구(食口)들이, 맏며느리로 들어온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얼핏 집 안의 분위기(雰圍氣)만 보아서도 가난의 때가 넘쳐 흐르고 있다는 것을 직감(直感)할 수 있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날품팔이로 생계(生計)를 근근(僅僅) 이어오고 있는 남편(男便) 하나만을 믿고 아홉 식구(食口)가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말로 표현(表現)할 수 없는 정도(程度)의 큰 고역(苦役)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시부(媤父)님까지 병명(病名)을 알 길이 없는 병마(病魔)에 시달리어 자리에 눕게 됐으니 얼마나 숨막히는 일이었을까. 

시부(媤父)님이 병석(病席)에 눕던 다음 날부터 조여사(曺女史)는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좋은 약(藥)을 구(求)하기에 심혈(心血)을 기울였는가 하면, 깊은 계곡(溪谷)과 산(山)골짝을 헤매면서 약초(藥草)를 캐는 등 그야말로 눈코 뜰사이 없이 동분서주(東奔西走)하였다. 

뿐만 아니라 기동(起動)까지 불편(不便)해지시니 하루에도 몇 차례나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기도 했고, 때로는 손수 깨끗하게 목욕(沐浴)도 시켜 드렸다. 

더구나 허덕이는 남편(男便)을 돕기 위해서 그 자신(自身) 품팔이 일터로 뛰어들어가 구슬땀을 흘려 일 하면서, 한편으로 시부(媤父)님 간병(看病)과 온 식구(食口)의 뒷바라지를 했다. 

간혹 잔칫집에 초대(招待)되어 갔을 때도 시부(媤父)님 생각에 목이 메어 차려 준 음식(飮食)을 싸가지고 와서 극진히 대접(待接)하는 등, 시(媤)어른의 안색(顔色)을 살피고 뜻을 맞추어, 굶주릴 땐 재빨리 배부르게 할 수 있도록 조치(措置)했고, 또한 추울 때는 따스하게 해 드렸다. 

어디 그뿐이랴 시(媤)동생과 시(媤)누이들의 뒷바라지도 그가 따뜻한 우애(友愛)로 감싸 모두 고등학교(高等學校)까지 졸업(卒業)시켜 결혼(結婚)까지 시켰다. 

신혼초(新婚初)부터 지금까지 꼬박 10년(年) 동안을, 오직 시부(媤父)님의 간병(癎病)과 시댁(媤宅) 식구(食口)들만을 위해 자신(自身)을 희생(犧牲)시켜 온 조여사(曺女史)는, 현재(現在) 농촌(農村)에서 흔히 성행(盛行)하고 있는 관광(觀光)놀이를 지금껏 한 번도 못 갔을 정도(程度)로, 10년(年)을 하루같이 낮에는 품팔이로, 그리고 밤에는 시부(媤父)님 병간호(病看護)를 위해 몸바쳐 왔다. 

"시부(媤父)님 대소변(大小便) 받아내기와 이에 대(對)한 뒤 처리(處理)가 지겹지도 않느냐?"는 이웃 주민(住民)들의 동정(同情)어린 말이 있을 때마다, 그는 "대소변(大小便) 냄새가 이제는 향수(香水)냄새만 같다."라는 대답(對答)으로 효(孝)의 참뜻을 일깨워 주기도 했다. 

한 가정(家庭)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화(和)와 순(順)을 근본(根本)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强調)하는 조여사(曺女史), 지금 한창 청춘(靑春)을 꽃피워야 할 젊은 나이에, 시부(媤父)님의 병(病)구완에 정성(精誠)을 다하고 자신(自身)을 희생(犧牲)하여 시댁(媤宅)을 일으켜 세운 그는, 화(和)와 순(順)으로 그려진 아름다운 마음 바로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