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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부터 내려오는 대가족제도(大家族制度)에서 부부중심(夫婦中心)의 핵가족제도(核家族制度)로 사회(社會)가 변천(變遷)됨에 따라, 노인(老人)에 대한 부양의식(扶養意識)이 쇠퇴(衰退)되어 노인문제(老人問題)가 새로운 사회문제(社會問題)로 대두(擡頭)되고 있는 요즈음, 남달리 대가족제도(大家族制度)에 만족(滿足)하면서 젊음과 정력(精力)을 송두리째 웃어른들에게 바치고 있는 갸륵한 여인(女人)이 있으니, 그가 바로 방경화(方景花) 여사(女史)이다.
가난한 농부(農夫)의 딸로 태어난 그는, 그의 나이 21세(歲)때 역시 가난한 농부(農夫)와 결혼(結婚)하였는데, 그때 시가(媤家)에서는 시증조모(媤曾祖母), 시조모(媤祖母),남편(男便),시(媤)누이 등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6년(年)이 흐른 지금에 와서는 슬하(膝下)에 두 자녀(子女)까지 생겨, 자그마치 1개(個), 분대(分隊)에 가까운 대가족(大家族)을 이루게 되었다.
가산(家産)이라고는 1,000여평(餘坪)의 논밭뿐으로서, 여유(餘裕)있는 다른
농가(農家)와는 달리 언제나 가난에 허덕이면서 살아야 했지만, 그는 시증조모(媤曾祖母)님을 비롯한 웃어른들이 가난 때문에 지금까지는 대접(待接)받아
본 일이 없을 정도(程度)의, 맛있는 음식(飮食)을 정성(精誠)을 다해 차려 드렸다.
뿐만 아니라 구순(九旬)에 이르른 시증조모(媤曾祖母)님과 74세(歲)의 시조모(媤祖母)님이, 서로가 약속(約束)이나 한 듯 병석(病席)에 눕는 일이 다반사(茶飯事)였지만, 방여사(方女史)는 조금도 싫어하거나 귀찮아하는 표정(表情)은 짓지 않고 이들을 번갈아 가면서 극진히 간호(看護)를 하였다.
노환(老患)으로 기동(起動)까지 어렵게 되자, 대소변(大小便) 받아내기와 목욕(沐浴)시켜 드리기도 했고, 조석(朝夕)으로 꼭 곁에 지켜 앉아서 한 술 두 술 밥을 떠먹여 드리기도 하는 등, 20대(代)의 새댁답지 않게, 그의 자상(仔詳)스러운 시중과 너그러운 행실(行實)은 효부(孝婦)바로 그것이었다.
때로는 시증조모(媤曾祖母)님은 시증조모(媤曾祖母)님대로 시조모(媤祖母)님은 시조모(媤祖母)님대로, 이부자리와 온 방 안에 대소변(大小便)을 배세(排泄)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럴 때마다 방여사(方女史)는 오히려 입가에 미소(微少)를 지으면서
"할머니 이것 우리 나라 지도(地圖)예요, 아니면 다른 나라 지도(地圖)예요? 우리 할머니 두 분 지도(地圖)그리기 올림픽 대회에 나가시면 금메달 두 개는 틀림없이 따 오시겠네."
하면서 좌중(座中)을 웃기는 바람에, 가정(家庭)은 언제나 방여사(方女史)때문에 웃음꽃이 지는 날이 없을 정도로 화목(和睦)을 유지(維持)해 나갔다.
그가 이 집에 시집온 후(後)로 이들의 병간호(病看護)를 해 온 지도 어언(於焉) 3년(年), 앞으로도 얼마가 더 이어질지 예측(豫測)할 수 없지만, 방여사(方女史)의 각오(覺悟)는 "효(孝)의 끝이 어디인지 알 길이 없지만 효(孝)의 끝까지 가보고 싶은 것이 나의 소망(所望)이다."라고 말할 정도(程度)로 그의 결심(決心)은 대단하였다.
중학교(中學校) 학창시절(學窓時節)부터 "덕행(德行) 없으면 행복(幸福) 없다."는 명언(名言)을 그의 좌우명(座右銘)으로 삼고 있는 방여사(方女史)는, 누가 보나 현대여성(現代女性)들 한테서는 보기 힘든 효부(孝婦)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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