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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한(鄭載漢) 여사(女史)는 19세(歲)되던 해에 출가(出嫁)하였으나, 남편(男便)은 이미 6세(歲)의 남아(男兒)와 2세(歲)의 여아(女兒)를 슬하(膝下)에 두고 있었다.
마침 이 무렵 중풍(中風)으로 오랫동안 고생(苦生)을 해 온 시모(媤母)님은, 앉은뱅이가 되어 몸져 누워 있는 처지(處地)였으므로 그의 결혼생활(結婚生活)은 순탄(順坦)할 수 만은 없었다.
지금껏 20여년(餘年) 동안 대소변(大小便)을 그의 손으로 일일이 받아내는 처지(處地)였으나, 감 놓아라 대추 놓아라 하는 격(格)으로, 시모(媤母)님의 간섭(干涉)은 하루가 다르게 면도칼처럼 날카롭기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자신(自身)에게 내려진 숙명(宿命)이요, 또한 운명(運命)으로 생각하면서, 현실(現實)에 부딪친 시련(試鍊)을 오히려 알뜰한 효성(孝誠)으로 이겨 나갔다.
매일(每日)같이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는 등 온갖 궂은 일을 계속(繼續)하면서, 시모(媤母)님으로 하여금 재기(再起)할 수 있도록, 시간(時間) 틈틈이 이런저런 물리운동(物理運動)도 꾸준히 시켜왔다.
마침내 그의 지성(至誠)에 하늘이 돌보았던지 일어설 수 없었던 시모(媤母)님이, 약간(若干)의 부축만 받으면 손수 일어나 걸을 수 있을 정도(程度)로 건강(健康)이 회복(恢復)되어 갔다.
여태까지 잘했느니 못했느니 하면서 온갖 간섭(干涉)을 다 하던 시모(媤母)님도, 며느리의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에 감격(感激)한 나머지 그의 두 손을 꼭 잡고 눈물로 사의(謝意)를 표(表)할 만큼, 정여사(鄭女史)는 그의 효심(孝心)을 송두리째 다 바쳤던 것이다.
이제는 정여사(鄭女史)의 오랜 소망(所望)이자 마지막 소원(所願)이었던 팔순(八旬)의 시모(媤母)님이, 자신(自身)의 힘으로 걷게 되자 그는 춤을 추며 기뻐하였다.
뿐만 아니라, 전실(前室)의 자식(子息)인 두 남매(男妹)도 각별한 자애(慈愛)로 키워서 웃음과 화목(和睦)으로 가정(家庭)을 꾸려 그 중 딸에게는 이미 결혼(結婚)의 기쁨을 안겨 주기도 했고, 자신(自身)이 낳은 자식(子息)들도 중학교(中學校)와 고등학교(高等學校)에서 열심히 학업(學業)에 몰두(沒頭)하고 있다.
특(特)히 정여사(鄭女史)는 남달리 애향심(愛鄕心)이 두텁기만 한데 마을을 위한 새마을 가꾸기와 절미(節米), 저축(貯蓄)에도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일을 하는 탓으로 "또순이"라는 별명(別名)이 붙여지기도 했다.
또한 그는 가정(家庭)과 마을의 안녕(安寧)과 평화(平和)를 위해, 맑은 정화수(井華水)를 떠 놓고 천지신명(天地神明)에게 간곡히 기도를 드리는 등 가정(家庭)을 아끼고 마을도 사랑하는 그의 정성(精誠)은 놀라울 정도(程度)였다.
그리고 항상(恒常) 자녀(子女)들에게 대(對)해서는
"대개 이름난 가문(家門)들이 성가(成家)한 것을 보면, 조상(祖上)들의 충성(忠誠)과 효도(孝道)와 근검(勤儉)이 바탕이 되어 이루어 졌더라."고 말하면서, 충(忠), 효(孝), 예(禮)의 생활화(生活化)를 몸에 익히도록 타이르곤 한다.
이젠 건강(健康)을 되찾은 시모(媤母)님은 며느리를 한결 사랑하고, 전실(前室)이 낳은 자녀(子女)들도 정여사(鄭女史)를 친(親) 어머니로 여기면서 따르니, 그가 이 집안에 들어와서 꽃피워 준 향기(香氣)를 만끽(滿喫)하면서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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