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정인순(鄭仁順)

페이지 정보

본문

제21회(1978년 4월 27일)
독행상(篤行賞)
대구시 서구 내당4동
효부(孝婦) 정인순(鄭仁順) 48세

정인순(鄭仁順) 여사(女史)는 남편(男便)이 몸저 눕게 되면서부터 그의 시모(媤母)님 봉양(奉養)의 뜨거운 정성(精誠)은 더욱 커져만 갔다. 

무엇보다도 지병(持病)으로 인(因)하여 남편(男便)이 생활능력(生活能力)이 없어지자, 그는 바구니를 둘러메고 이 집 저 집을 찾아 다니면서 행상(行商)으로, 또 남의 품삯일과 남자(男子)도 감내(堪耐)하기 어려운 막 노동(勞動)으로 다섯 식구(食口)의 힘겨운 생계(生計)를 이어나갔다. 

남편(男便)의 병(病)은 자그마치 10여년(餘年)으로 이어져 갔고, 거리다 80 고령(高齡)의 시모(媤母)님 마저 중풍(中風)으로 쓰러지는 그야말로 엎친 데 엎친 격(格)으로 가정(家庭)의 비운(悲運)은 그칠 날이 없었다. 

그뿐이 아니라 노령(老齡)의 시모(媤母)님도 날이 갈수록 기골(氣骨)이 쇠약(衰弱)하여져 갔다. 

그러나 정여사(鄭女史)는 조금도 실망(失望)하지 않고 한편으로는 남편(男便)의 간호(看護)를 또 한편으로는 시모(媤母)님의 뒷바라지를 정성(精誠)을 기울여 돌보았다. 

중풍환자(中風患者) 시모(媤母)님이 대소변(大小便) 처리(處理)를 아무런 불평(不平) 없이 15년간(年間)을 계속해 온 그는 비단, 역겨운 용변처리(用便處理)뿐 아니라 수시(隨時)로 목욕(沐浴)을 시켜 드리기도 했고, 때로는 마을로 모시고 나가서 세상(世上)돌아가는 일들을 구경(求景)시켜 몸소 눈여겨 보시도록 세심(細心)한 데까지 신경(神經)을 쓰면서 지성(至誠)으로 병(病)구완을 하였다. 

비록 정여사(鄭女史)는 학교(學校) 문전(門前)에도 가보지 못한 무학자(無學者)이긴 했지만, 나름대로 여기 저기서 귀담아 들어온 춘향전(春香傳)과 심청전(沈淸傳), 이 밖에 장화홍련전(薔花紅蓮傳) 등, 옛부터 내려오는 고대소설(古代小說)을 구수하게 읽어드리면서 시모(媤母)님의 무경(無卿)함을 달래 드리기도 하였다. 

더욱이 해마다 맞는 시모(媤母)님 생신일(生辰日)에는 마을 노인(老人)들을 한 자리에 모셔 놓고 손수 술과 여식(旅食)을 대접(待接)하는 등 그의 정성(精誠)은 대단하였다. 

오죽했으면 같은 병석(病席)에 누워 있던 남편(男便)이 감동(感動)한 나머지 울음까지 터뜨렸을까. 

하루는 시모(媤母)님께서 노망기(老妄氣)의 발로(發露)였는지 알 수 없지만, 집에 아무도 없는 사이에 이런저런 세간살이를 때려부수고, 그것도 부족(不足)해서 여기 저기에다 대소변(大小便)으로 칠하는 등 기막힌 일들을 저질러 놓았지만, 그 여(女)는 조금도 이를 내색(內色)하지 않고 이 말이 동내(洞內)에 퍼질세라 혼자서 쉬쉬 하면서 방 안 정리(整理)를 다시 깨끗하게 해 놓은 일도 있었는데 남편(男便)에게는 실수(失手)로 가재도구(家財道具)의 일부(一部)가 망가졌다고 할 정도로 시모(媤母)님을 위로하는 효성심(孝誠心)은 지극(至極)하기만 했다. 

10년(年)이면 강산(江山)도 변(變)한다고 했는데, 그것도 15년간(年間)을 하루같이 중풍환자(中風患者)의 손발이 되어 온 정여사(鄭女史)의 효성(孝誠). 

거룩한 그의 효행(孝行)이 마침내 마을과 마을로 퍼지자 1978년(年) 1월(月)에는 내당4동(內唐4洞) 마을 금고(金庫)에서 효행상(孝行賞)을 그의 목에 걸어 주기도 했다. 

시상식(施賞式)이 있던 날, 온 마을 주민(住民)들이 구름 때같이 모여들어 그의 장(壯)한 행적(行績)에 감동(感動)하여 칭송(稱訟)의 뜨거운 박수(拍手)를 보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