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정보
본문
농촌(農村)에서 태어난 이학주(李學珠) 여사(女史)는 18세(歲) 때에 서윤구씨와(徐允垢씨)와 결혼(結婚)하여 슬하(膝下)에 무녀독자(無女獨子)인 용훈군(庸薰君)을 낳아 기르면서 남부럽지 않게 단락(團樂)하게 살았다.
그러나 10년 전(年前)인 1968년(年) 초겨울에, 뜻밖에도 가정(家庭)의 기둥이며 하늘같이 믿었던 부군(夫君)과 사별(死別)하게 되는 비운(悲運)을 맞게 되니, 이 때부터 이여사(李女史)는 고난(苦難)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연약(軟弱)한 여자의 몸으로서, 아래로는 철없는 어린 자식(子息)의 양육(養育)을 하면서 위로는 구순(九旬)을 바라보는 시모(媤母)님을 모시고서 혼자의 힘으로 어려운 세파(世波)를 헤치며 살아가야 할 가난한 도시(都市)의 영세(零細) 소시민(小市民)이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이여사(李女史)는, 부군(夫君)이 맡아 해 오던 가정(家庭)의 제반사(諸般事)를 도맡아 해 가면서도, 시모(媤母)님을 정성(精誠)스럽게 봉양(奉養)하여 오던 가운데 5년 전(年前)부터는 시모(媤母)님께 우연(偶然)히 노년층(老年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혈압(高血壓)과 중풍증세(中風症勢)를 일으켜서 기동(起動)조차 자유(自由)롭게 할 수 없는 병상(病床)의 몸이 되었던 것이다.
효부(孝婦) 이학주(李學珠) 여사(女史)는 5년(年)이란 세월(歲月)을 하루같이 시모(媤母)님의 대소변(大小便) 받아내기를 얼굴 한 번 찡그리는 법 없이 항상(恒常) 깨끗하게 처리(處理)하고, 더럽혀진 옷은 빨아 날마다 새 옷으로 갈아 입혔다.
자신(自身)은 라면으로 하루 한두 끼의 끼니를 이어가는 그 어려운 생활(生活) 속에서도 끼니때마다 시모(媤母)님께는 식성(食性)에 맞는 새로운 반찬(飯饌)을 정성(精誠)껏 만들어 드렸다.
가난한 소치(所致)로 현대(現代) 의료기관(醫療機關)의 혜택(惠澤)을 받을 수 없는 형편(形便)이기에 갖은 애를 쓰면서 고혈압(高血壓)과 중풍(中風)에 좋다는 약(藥)은 동분서주(東奔西走)하면서 백방(百方)으로 구(求)하여 시탕(侍湯)하면서 오늘날까지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으로 구료(救療)하고 있다.
또한 이여사(李女史)는 인정미(人情味)가 남달라 풍부(豊富)하여 이웃 사람들의 길흉사(吉凶事)를 자기(自己)일처럼 발벗고 나서서 열성(熱誠)있게 보살펴 주고 있다.
모든 일을 남 먼저 몸소 실천(實踐)하는 모범적(模範的)인 주부(主婦)라 하여, 주위(周圍)사람들은 보는 이마다 아낌없는 찬사(讚辭)를 보내고 있으니, 각박(刻薄)한 도회지(都會地)의 세태(世態)속에서 그 부덕(婦德)을 어찌 간과(看過)할 수 있겠는가?
타락(墮落)된 동양(東洋) 고유(固有)의 윤리도덕(倫理道德)의 기풍진작(氣風振作)이 강렬히 요청(要請)되는 오늘에 있어서, 역경(逆境) 속에서도 모든 난관(難關)을 극복(克服)하며 노시모(老媤母)님의 손발이 되어, 오로지 그 봉양(奉養)과 구료(救療)에 묵묵(默默)히 몸 바쳐 온 이여사(李女史)의 숨은 인품(人品)이야말로, 살아있는 윤리(倫理)의 교촌(校村)로서 높이 평가(評價)되고 타(他)의 귀감(龜鑑)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 이전글제21회 보화상(補化賞) 본상(本賞) 하순남(河順南) 25.05.13
- 다음글제21회 독행상(篤行賞) 정인순(鄭仁順) 25.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