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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미경(禹美京孃)은 가내(家內) 침공업(鍼工業)을 하는 아버지 우만수씨(禹萬壽氏)의 1남(男) 3녀(女) 중(中) 장녀(長女)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사업(事業)이 실패(失敗)하면서부터 우양(禹孃)의 가정(家庭)에는 먹구름이 덮기 시작했고, 가옥(假屋)도 방 한 칸의 전세(傳貰)집으로 옮기는 않으면 안되었다.
어릴 때부터 어려운 환경(環境)에서 성장(成長)한 우양(禹孃)은, 국민학교(國民學校)에 입학(入學)한 후(後) 줄곧 우등생(優等生)을 지켜올만큼 성적(成績)이 우수(優數)했을 뿐만 아니라 남달리 자립심(自立心)도 강(强)하였다.
그러니까 우양(禹孃)은 학교(學校)에서 귀가(歸家)한 후 숙제(宿題)등 공부(工夫)를 끝내면, 그 길로 일손이 바쁜 시장(市場) 상인(商人)의 아기를 돌봐 주기도 했고, 때로는 점포(店鋪)를 대신(代身) 지켜 주기도 하면서, 비록 푼돈이긴 했지만 나름대로 돈벌이를 하였다.
어려운 가정(家庭)살이에 다소(多少)나마 보탬을 주기 위해 시작한 그의 고운 마음씨는, 마침내 여기저기서 수양딸을 삼겠다고 할 정도(程度)로, 그는 어릴 때부터 효심(孝心)이 지극한 학생(學生)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후(後)에도 줄곧 아기보기와 가게 지켜주기를 계속(繼續)하여, 거기서 얻은 수입(收入)으로 가정(家庭)에 보태기도 했고, 그 돈으로 중학진학(中學進學)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그는 자신(自身)의 학비(學費) 외(外)에도 동생들의 학용품(學用品) 일체도 마련해 주는 등, 부모(父母)가 못다하는 일을 어린 우양(禹孃)이 대신(代身)하여 꾸려 나갔다.
마침내 그는 개근상(皆勤賞)과 우등상(優等賞)으로 모든 학생(學生)들에게 으뜸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기도 했는데, 끝내 장학생(奬學生)으로 선발(選拔)이 되어 부모(父母)님의 학비(學費)걱정을 덜어주는 효자(孝子) 구실을 하기도 하였다.
어머니가 품팔이로 짐을 비울 때는, 가족(家族)의 식사준비(食事準備)와 집 안팎의 청소(淸掃)를 도맡아 하기도 했는데, 학교(學校)에서 학급실장(學級室長)으로 뽑혔을 때도, 솔선수범(率先垂範)하여 비를 들고 청소(淸掃)하는 근면성(勤勉性)과 성실(誠實)을 보여 주기도 하였다.
국수 끓인 물로 굶주린 배를 달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는 절대 부당(不當)한 이익(利益)을 탐내는 일이 없을 만큼 정직(正直)했으며, 또 어쩌다가 생긴 돈이라도 함부로 낭비(浪費)하는 일 없이 꼭 저축(貯蓄)하는 습관(習慣)을 길러 갔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그리고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일상생활(日常生活)에 쫓기다 보면, 자신(自身)들의 생일(生日)마저 망각(忘却)할 때가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어린 우양(禹孃)의 부모(父母)님의 생일(生日)을 배려(配慮)하고, 하다못해 조그마한 생일선물(生日膳物) 케잌이라도 마련해 드렸다고 한다.
이와 같은 행실(行實)에 그의 부모(父母) 행실(行實)에 그의 부모(父母)는 감격(感激)에 넘쳐 속 울음을 터뜨릴 만큼, 우양(禹孃)은 남달리 효심(孝心)이 두터운 갸륵한 소녀(少女)였다.
그 자신(自身)이 외출(外出)을 하진 귀가(歸家)할 때는 반드시 "출필고반필면"(出必告 反必面)을 행(行)하여, 동생들에게 모범(模範)을 보여 주기도 했는데 지금은 동생들도 빠짐없이 "필출고(必出告) 반필면"(反必面)이 생활화(生活化)되었을 정도(程度)로, 그 언니에 그 동생들이라는 칭찬(稱讚)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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