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손규철(孫圭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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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회(1979년 4월 14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안동시 평화동
선행(善行) 손규철(孫圭哲) 34세

어릴 때부터 사회사업(社會事業)이 꿈이었던 손규철씨(孫圭哲氏)는, 마침내 그의 소망(所望)대로 한국사회사업대학(韓國社會事業大學)을 거쳐 듣지도 말하지도 못 하는 사람을 위해 농아학교(聾啞學校)를 그의 힘으로 설립(設立), 불우(不遇)한 이들에게 한 가닥 빛과 희망(希望)을 안겨 주고 있다. 

세상(世上) 대대(代代)로부터 물려받은 토지(土地)를 과감(果敢)히 처분(處分)하여 산(山)비탈에 신출교사(新築校舍)를 마련한 그는, 1967년(年)부터 신입생(新入生)을 모집(募集)하였던 바, 의외(意外)에도 각지(各地)에서 어렵고 헐벗은 농아(聾啞)가 수없이 몰려들었는데, 그때만 해도 허술하기 짝이 없었던 기숙사(寄宿舍)에 이들을 수용(收容)하는 한편, 이들에게 필요(必要)한 인쇄(印刷), 목공(木工)등 배움의 문(門)을 열어 주기 시작하였다. 

특(特)히 그는 낮에는 열심히 공부(工夫)를 가르쳤고, 밤에는 그들과 기숙사(寄宿舍)에서 침식(寢食)을 같이 하면서 건강(健康)한 잠자리를 돌보아 주는 등, 따뜻한 사랑으로 이들의 대부(代父)노릇을 해 주기도 하였다. 

해를 거듭할수록 학생수(學生數)는 늘어나 교실난(敎室難)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중학교(中學校)에서 교편생활(敎鞭生活)을 하고 있는 그의 부인(夫人)의 봉급(俸給)까지 송두리째 털어서 학교운영(學校運營)에 공백(空白)이 없도록 헌신노력(獻身努力)을 하였다. 

가정(家庭)과 사회(社會)에서 냉대(冷待)를 받는 슬픔 속에서 자라난 이들 농아(聾啞)들은, 손씨(孫氏)를 가리켜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程度)로 그의 인자(仁慈)한 손길은 따뜻하기만 했는데, 오죽했으면 그의 뜨거운 인간애(人間愛)에 감동(感動)되어 목공기술(木工技術)과 인쇄기술(印刷機術) 등을 완전(完全)히 익히고 교문(校門)을 나설 때마다 농아(聾啞)도 울고 교장(校長)을 비롯한 전교직원(全校職員)이 서로 얼싸안고 석별(惜別)의 눈물을 한없이 흘렸으랴. 

특(特)히 손교장(孫校長)은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이들 농아(聾啞)들에게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라는 올림픽 구호(口號)로 불굴(不屈)의 의지(意志)를 가슴마다 깊이 심어 주기도 했는데, 그 좋은 결과(結果)가 1976년(年)에 있었던 경북배구연맹회장기(慶北排球聯盟會長期) 쟁탈대회(爭奪大會)에서 영광(榮光)의 우승(優勝)을, 그리고 각종 배구대회(排球大會)에서도 빛나는 성적(成積)을 게양하는 등 체능교육(體能敎育)을 위해서도 힘써 왔다. 또한 오랜 숙원(宿願)이던 보청기(補聽器) 75태(台)도 설치하여 언어교육(言語敎育)에 이바지 했고, 배출(輩出)되는 학생(學生)들의 취업(就業)을 위해 시내(市內) 각 전문업소(各 專門業所)에 위탁교육(委託敎育)을 시킬 때도, 사비(私費)로 농아(聾啞)들의 편리를 도모(圖謀)해 주기도 하였다. 

이 밖에 와이즈맨 클럽의 후원(後援)과 복지사업재단(福祉社業財團)의 지원(支援)을 받아, 교내(校內)에 보도관(輔導館)을 설치(設置)하여 기술연마(技術鍊磨))와 우수제품(優秀製品)을 생산(生産)할 수 있는 산학협동체제(産學協同體制)를 구축(構築), 여기서 생긴 수입금(收入金)으로 복자증진(福祉增進)에 투자(投資)하기도 하였다. 

불우(不遇)한 농아(聾啞)들을 눈물과 사랑으로 보살펴 온 손규철(孫圭哲) 교장(校長)은 지금까지 걸어온 체험(體驗)을 거울 삼아서 이들을 위한 참다운 등불이 될 것이라고 두 번 세 번 굳게 다짐하는 것이었다. 

"촛불은 남을 비추어 주고 자신(自身)을 태운다."라는 한 마디 말로써 자신(自身)의 인생관(人生觀)과 사회관(社會觀)을 나타내기도 하는 그는, 시모(媤母)님과 어머니에 대(對)해서도 기특한 효자(孝子)로 알려졌고, 가정(家庭)에서는 "개미아빠"라는 별명(別名)이 뒤따를 만큼 부지런한 가장(家長)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