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권남숙(權南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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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회(1979년 4월 14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청송군 파천면
효부(孝婦) 권남숙(權南淑) 55세

17세(歲)의 어린 나이로 결혼(結婚)한 권남숙(權南淑) 여사(女史)는,16년(年)만에 남편(男便)과 사별(死別)하고 그 자신(自身)이 여가장(女家長)이 되어 시부모(媤父母)님을 모시고 자녀(子女)들을 키워 가야만 하였다. 

노시부모(老媤父母)님의 끼니를 잇기 위해서 품팔이를 하는 등 온갖 고생(苦生)을 하면서 그런 대로 살아오던 중, 시모(媤母)님이 1960년(年)부터 중병(重病)으로 눕게 되었다.

평소(平素)에도 시부모(媤父母)님 봉양(奉養)에는 둘째 가라면 서운해 정도(程 度)로, 옥(玉)이야 금(金)이야 할 만큼 정성(精誠)을 다 쏟아 온 그는, 시모(媤母)님이 중병(重病)으로 눕게 되자 걱정이 태산(泰山)만 같았는데, 그것은 바로 찢어지는 가난 때문에 약(藥)한첩 변변히 사들이지 못하는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마음으로만 정성(精誠)을 다해 병간호(病看護)를 해 오던 중, 어느 날 밤 꿈에 백발노인(白髮老人)이 안개처럼 나타나 "어느 곳에 가면 귀(貴)한 약초(藥草)가 있으니 지체하지 말고 가 보도록 하여라."라는 꿈의 계시(啓示)를 받고 백발노인(白髮老人)이 알려 준 산중(山中)에 가 보았더니, 아니다 다를까 꿈에 나타난 모습 그대로의 약초(藥草)가 있어 그것을 채취(採取)하여 시모(媤母)님에게 달여 드렸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것은 중병(重病)에서 죽음만은 기다리던 시모(媤母)님이, 그 약초(藥草)를 복용(服用)한 결과 신기(神奇)할 정도로 건강(健康)이 회복되었다고하며, 그 후(後) 시모(媤母)님은 10년(年)이란 세월(歲月)을 더 연명(延命)했다고 한다. 

그러던 시모(媤母)님이 별세(別世)하자, 이번에는 80 고령(高齡)의 시부(媤父)님이 노환(老患)으로 눕게 됐는데, 하루에도 몇 차례의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잠시(暫時)라도 방(房)을 비우면 방바닥과 벽(壁)에 대변(大便)으로 지도(地圖)를 그려 놓기 일쑤였고,이부자리에도 오물(汚物)로 그림을 그려 놓는 등 노환(老患)의 불작란(作亂)은 날이 갈수록 극심(極甚)해지기만 하였다. 

그러나 권여사(權女史)는 그를 더욱 불쌍히 여기면서 얼굴 표정(表情)한번 찡그리지 않고, 어질러 놓은 것을 깨끗이 처리(處理)한 후(後) 다시 목욕(沐浴)시켜서 옷을 깨끗이 갈아입히는 등 따뜻한 그의 손길을 한(限)이 없었다. 

그 녀(女)가 고생(苦生)하는 것을 보다못한 동내(洞內) 부인(婦人)들이 "하루이틀도 아닌 긴긴 세월(歲月)을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물으면 "당신들도 나이가 들면, 우리 집 시아버님처럼 자리에 눕게 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느냐?"고 반문(反問)하면서, 천수(天壽)를 누릴 때까지 봉양(奉養)해 드리는 것이 자식(子息)된 도리(道理)임을 그들에게 새삼 깨우쳐 주는 진실(眞實)된 효(孝)의 실천자(實踐者)가 곧 권여사(權女史)였고, 한 평생(平生)을 오로지 시부모(媤父母)님 봉양(奉養)과 병간호(病看護)에 몸과 마음을 다 바친 효부(孝婦)가 바로 권여사(權女史)이다. 

그의 이와 같은 숨은 미담(美談)은 인근(隣近) 마을을 위시하여 파천면(巴川面) 일대(一帶)의 귀감(龜鑑)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