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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부모(媤父母)와 남편(男便),시(媤)동생 3명(名), 그리고 밥그릇 몇 개(個)와 이불 몇 채, 바로 이 목록(目錄)들이 이필임(李畢任)여사(女史)가 시집온 시가(媤家)의 전가산(全家産)이었다.
소작(小作)하는 농토(農土)가 한 마지기쯤 있기는 했지만, 그것으로는 일곱 식구(食口)가 입에 풀칠도 하기가 어려워, 시집온 지 며칠만에 신부(新婦)의 화장(化粧)도 지울 사이도 없이, 이여사(李女史)는 온갖 굴욕(屈辱)을 무릅쓰고 모내기를 비롯한 김매기 등 손에 닥치는 대로 품팔이를 하면서 어려운 가계(家計)를 꾸려 나갔다.
가난뿐이면 또 견딜 수 있었겠는데, 결혼(結婚) 3년(年)만에 앞 못 보는 시부(媤父)님이 수족불구(手足不具)의 중풍(中風)으로 눕게 되어, 이여사(李女史)가 해야 할 가사(家事)가 하나 더 늘어나게 되었다.
하루가 멀다 할 만큼 중풍(中風)에 좋다는 약초(藥草)캐기에 나섰는가 하면, 여름에는 시원한 곳으로 ,그리고 추운 겨울에는 따뜻한 곳으로 모시고 다니기도 했고, 손수 머리를 깎아 드린 후(後) 깨끗하게 씻어 드리는 등 그의 갸륵한 효성(孝誠)에는 밤낮이 없었다.
대소변(大小便) 처리(處理)는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런데 이여사(李女史)의 마음을 더욱 괴롭혔던 것은, 15년전(年前) 군(軍)에서 얻은 정신병(精神病)으로 매일(每日)같이 말썽을 부리는 둘째 시(媤)동생 문제(問題)였다.
하루는 장독을 깨는가 하면, 다음 날은 동리(洞里) 처녀(處女)들을 따라다니며 돌을 던지기도 했고, 또 어떤 때는 자신(自身)이 입고 있는 옷을 찢기도 하고 물어뜯기도 하는 등, 시(媤)동생의 병세(病勢)는 더욱 거칠어지므로, 하는 수 없이 뒷방에다 반감금상태(半監禁狀態)로 가둬 놓고, 그의 비위를 이리저리 맞추어 주어야만 했는데, 그 고충(苦衷)은 말로 다 표현(表現)할 수 없을 정도(程度)였다.
거기다 또 시모(媤母)님도 시름시름 앓으시면서 시부(媤父)님 곁에 눕는 딱한 처지(處地)가 되었다.
이제 이여사(李女史)는 앞 못 보는 중풍환자(中風患者) 시부(媤父)님과 역시 중풍(中風)으로 병석(病席)에 누운 시모(媤母)님, 그리고 때로는 정신병자(精神病者)인 시(媤)동생에 이르기까지, 번갈아 가며 밥도 떠먹여 주고 용변(用便)도 처리(處理)해 줘야 하는 고난(苦難)의 가시밭길을 걷지 않으면 안되었다.
남편(男便)과 더불어 가난을 밥 먹듯이 하면서 자그마치 20여 년 간(余年間)의 긴 세월(歲月)을, 다시 말해서 이여사(李女史)는 그의 청춘(靑春)을 송두리째 바쳐 버리고, 중년(中年)을 넘어설 때까지 병(病) 뒷바라지만 해 온 근래(近來)에 보기드문 여성(女性)으로서, 시모(媤母)님이 별세(別世)하신 후(後)에도 홀로 계신 시부(媤父)님의 눈이 되고 손발이 되어 그가 지닌 효심(孝心)을 모두 바치고 있다.
가난을 숙명(宿命)으로 여기지 않고, 기어이 가난이란 굴레에서 벗어나 잘살아 보려고 몸부림치는 이여사(李女史)의 끈덕진 집념(執念)과 근면정신(勤勉精神)은 온 마을의 귀감(龜鑑)이 되고 있는데, 특히 그 여(女)는 학교(學校) 문(門)앞에도 가 보지 못한 무학자(無學者)이긴 했지만,"거미도 줄을 쳐야 벌레를 잡는다"는 옛 속담(俗談)을 자녀(子女)들에게 들려 주면서, 거미처럼 부지런한 인간(人間)이 되어야 한다고 아침 저녁으로 타이르는 엄(嚴)한 어머니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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