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정월선(鄭月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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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회(1979년 4월 14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의성군 봉양면
효부(孝婦) 정월선(鄭月先) 53세

시부모(媤父母)님을 모시고 일선(一線)에서 남편(男便)이 무사(無事)히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살아오던 정여사(鄭女史)는, 뜻밖에 남편(男便)의 전사통지서(戰死通知書)를 접(接)하고 6.25의 비극(悲劇)을 새삼 통탄(痛嘆)하면서 슬픈 나날을 보냈다. 

남편(男便)이 남긴 아들 하나와 연로(年老)하신 시부모(媤父母)님을 모신 가정(家庭)살이는, 그의 혼자 힘으로 꾸려가기엔 너무나 벅차기만 했지만, 자신(自身)마저 실의(失意)에 빠질 경우 시부모(媤父母)님은 또 얼마나 실망(失望)하실까 하는 마음이 앞서, 낮에는 품팔이로 나섰고 밤에는 호롱불을 켜 놓고 삯바느질을 하면서, 웃어른들에게 불편(不便)한 일이 없도록 최선(最善)을 다하면서 살아나갔다. 

그런데, 시부(媤父)님이 65세(歲) 되던 해에 중풍(中風)으로 쓰러지셨고, 이로 인(因)해 끼니도 이어가기 어려울 정도(程度)로 생계(生計)는 더욱 쪼들려만 갔다. 

품삯으로 벌어 오는 돈이라야 고작 5백원 안팎이었는데, 그는 그 돈을 다시 쪼개어 시부(媤父)님 약(藥)값으로 보태는가 하면, 수시로 시부(媤父)님이 좋아하는 음식(飮食)을 사다 드리기도 하였다. 

그러한 가운데서 이번에는 또 시모(媤母)님마저 앞을 못 보면서 병석(病席)에 눕는 바람에 정여사(鄭女史)의 손길은 더욱 바빠지기만 하였다. 

중풍(中風)으로 누운 시부(媤父)님의 대소변(大小便) 뒷바라지가 급선무(急先務)였고, 문(門)밖 출입(出入)도 못하는 시모(媤母)님을 위해서는 식사(食事)시중도 해야 하고 용변처리(用便處理)도 해 드려야 하는, 이중삼중(二重三重)의 고역(苦役)이 그의 두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지만, 그는 모든 것을 운명(運命)으로 돌리고 오히려 자기자신(自己自身)의 봉양부족(奉養不足)으로 두 어른이 병석(病席)에 눕게 되었다고 자책(自責)하면서, 더욱 더 정성(精誠)을 한 곳으로 모아 극진하게 간병(看病)을 하였다. 

어느 날 하루는, 당장 끼니가 없어 친정(親庭)에서 쌀을 얻어 오기도 했는데, 그 때도 얻어 온 쌀의 반(半)은 팔아서 시모(媤母)님의 약(藥) 다섯 첩을 사 오기도 했지만, 끝내 시모(媤母)님은 며느리의 따뜻한 효성(孝誠)도 외면(外面)한 채 별세(別世)하셨고, 그로부터 2년 후(年後) 다시 시부(媤父)님마저 중풍(中風)에다 겹친 합병증(合倂症)으로 타계(他界)하시는 비운(悲運)을 맞게 되었다. 

불행중(不幸中)다행(多幸)이라고나 할까, 마을 사람들의 따뜻한 온정(溫情)으로 두 차례에 걸친 장례(葬禮)는 무사(無事)히 치를 수 있었지만, 이로 인(因)한 빚으로 그나마 한 채뿐인 초가(草家)도 남에게 넘어가 셋방살이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막상 눈물로 키운 단 하나뿐인 아들은, 친정(親庭)의 도움으로 고등학교(高等學校)를 거쳐 한국은행(韓國銀行)에 취업(就業)하게 되어 이제는 지난날의 가난과 슬픔과 고통(苦痛)도 차츰 잊어지게 되었다. 

정여사(鄭女史)는 그 자신(自身) 온갖 고생으로 심신(心身)이 지쳐 있는 상태(狀態)이지만, 수시로 산소(山所)를 찾아가서 성묘(省墓)하는 성의(誠意)도 남다른데, 그럴 때마다 정월선(鄭月先) 여사(女史)는 자신(自身)의 봉친(奉親)의 정성(精誠)이 부족(不足)하여 시부모(媤父母)님께서 세상(世上)을 떠나셨다고 자책(自責)하면서 눈물짓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