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정종순(鄭從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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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회(1979년 4월 14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울릉군 남면
효부(孝婦) 정종순(鄭從順) 58세

어릴 때 부모(父母)님이 세상(世上)을 떠나 오빠들 밑에서 성장(成長)한 정종순(鄭從順) 여사(女史)는, 천성적(天性的)으로 마음도 곱고 예의범절(禮儀凡節) 등 모든 행실(行實)도 아름다운 풍형적(豊型的)인 한국(韓國)의 여인상(女人像)이다. 

20세(歲)되던 해에 결혼(結婚)한 정여사(鄭女史)는, 시부모(媤父母)님을 봉양(奉養)하고, 남편(男便)도 하늘처럼 받들면서 살아오던 중(中), 뜻하지 않게 남편(男便)이 중병(重病)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때 이미 그에게는 4명(名)의 여자(女子)가 태어났으며, 시부모(媤父母)님도 90의 고령(高齡)으로 접어든 시기(時期)였고, 생활(生活)은 곤궁(困窮)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는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동분서주(東奔西走)하면서 좋다는 약(藥)은 모두 구(求)하여 남편(男便)에게 복용(服用)시켰다. 

그러나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인 듯 정여사(鄭女史)가 29세(歲)되던 해에 남편(男便)은 타계(他界)하였으며, 이로 인(因)해 생활(生活)은 입에 풀칠도 하기 어려운 실정(實情)이어서, 하는 수 없이 최후(最後)의 생활수단(生活手段)으로 품팔아, 막노동(勞動)과 산나물 캐기 등으로 연명(延命)해 갔으며, 그나마 국수도 끓여 먹기가 어려웠을 때는 칡뿌리로 목숨을 근근 이어가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어려운 역경(逆境)속에서도 그가 시부모(媤父母)님을 위하는 마음은 놀랍기만 했는데, 실례(實例)를 들면 매일(每日) 음력(陰曆) 초하루와 보름에 실시(實施)하는 삭망전(朔望奠)을 그것도 사망자(死亡者)가 아닌 생존자(生存者)에게 드리는 일을 손꼽을 수 있겠다. 

죽고난 후(後)에 잘 차려 드리면 부슨 소용(所用)이 있겠는가? 하는 것이 정여사(鄭女史)의 뜻으로서, 그는 매월(每月) 돈을 아끼고 쪼개서 초하루와 보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맛있는 음식(飮食)을 시부모(媤父母)님께 차려 드리는 일을 지금껏 단 한 차례도 거르는 일없이 실천(實踐)해 오고 있다. 

지극(至極)한 그의 효성(孝誠)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90 고령(高齡)으로 노환(老患)이 짙어진 두 어른이 번갈아 가며 대소변(大小便)을 아무렇게나 보아도, 단 한 마디 불평(不平)도 없이 처리(處理)하는가 하면, 특(特)히 몹시 편찮을 때는 손수 등에 업고 병원(病院)을 찾아가기도 하였다. 

어느 해에는 시부모(媤父母)님께서 신부종기(腎部腫氣)로 고통(苦痛)을 받고 있을 때, 입으로 더러운 종기(腫氣)를 하루에도 몇 차례 빨아내어 기어코 완쾌(完快)되게 하는 등, 그의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은 신령(神靈)님도 탄복(歎服)해 마지않을 정도(程度)였다. 

효성(孝誠)이란 살아 생전(生前)에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철저(徹底)한 인생철학(人生哲學)이었는데, 그의 이와 같은 굳은 신념(信念)은 자식(子息)들에게까지 이어져, 그 어머니에 그 자녀(子女)들이라는 것을 실감(實感)케 했는데, 그 좋은 예(例)가 바로 자녀(子女)들의 웃어른에 대한 지극(至極)한 공경심(恭敬心)이었다. 

비록 그는 가난에 쪼들리면서 하루살이 인생(人生)처럼 살아가고 있었지만, 그가 지닌 효심(孝心)의 주머니만은 엄청난 부자(富者)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울릉군수(鬱陵郡守)로부터 1960년(年)에 효부상(孝婦賞)을 받기도 했던 정여사(鄭女史)야말로 울릉군(鬱陵郡)이 낳은 출천지효부(出天之孝婦)라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