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박윤화(朴允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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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회(1979년 4월 14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예천군 감천면
효부(孝婦) 박윤화(朴允花) 52세

6.25비극(悲劇)은, 결혼생활(結婚生活) 2년(年)밖에 안된 임윤화(林允花) 여사(女史)의 가슴도 울려 놓았으니, 그것은 곧 남편(男便)이 전사(戰死)했다는 기막힌 비보(悲報)였다. 

남편(男便)은 무정(無情)하게도 27세(歲)의 젊은 아내와 딸 하나, 그리고 노경(老境)에 접어든 시부모(媤父母)님을 남겨 두고 먼저 세상(世上)으로 가 버렸다. 

꽃다운 청춘(靑春)에 과부(寡婦)가 된 임여사(林女史)는, 신혼초기(新婚初期)의 달콤했던 부부생활(夫婦生活)을 머리 속에 그리면서 괴로운 나날을 눈물로 보냈으며, 어떤 때는 하루에도 여러 차례 집을 박차고 나가고 싶었던 충동(衝動)도 없지 않았지만, 그는 모든 유혹(誘惑)을 과감(果敢)히 물리치고 시부모(媤父母)님 모시는 일과 가정(家庭)에 충실(忠實)할 것을 스스로 굳게 다짐하면서 오늘까지 살아왔다. 

연금(年金)과 몇 마지기의 논밭으로 생활(生活)을 꾸려 오던 중, 시부(媤父)님이 중풍(中風)으로 쓰러지게 되니 그 날부터 임여사(林女史)의 극진한 간호(看護)가 뒤따랐다. 

마침 바쁜 농사(農事)철이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일손 틈틈이 집으로 뛰어가 시부(媤父)님을 알뜰하게 봉양(奉養)했는데, 그의 지극(至極)한 효성(孝誠) 탓일까? 뜻밖에 시부(媤父)님은 종천(從前)처럼 건강(健康)을 되찾게 되어, 어둡기만 했던 가정(家庭)에 다시 웃음꽃이 피어나게 되었다.

그 때 임여사(林女史)는 불과(不過) 28세(歲)의 청춘(靑春)이었는데, 같은 연배(年輩)의 전쟁미망인(戰爭未亡人)들 중 더러는 재가(再嫁)도 했지만, 그만은 전사(戰死)한 남편(男便)만이 자신(自身)의 유일(唯一) 남편(男便)이라는 굳은 신념(信念)으로 재가(再嫁)는 꿈 속에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시부(媤父) 님이 건강(健康)을 되찾게 되자, 이번에는 시모(媤母)님이 중풍(中風)으로 눕게 되어 또다시 임여사(林女史)의 손길을 필요(必要)로 했다. 

한편으로 논밭에 나가 농사(農事)를 지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정성(精誠)들여 시모(媤母)님을 간병(看病)을 위해 갖고 정성(精誠)을 다 바쳤다. 

그러나 끝내 정성(精誠)어린 구완의 보람도 없이 시모(媤母)님은 불귀(不歸)몸이 되었고 시부(媤父)님만이 홀로 남게 되었다. 

이와 같은 역경(逆境)이 뒤를 이을 때마다 재가(再嫁)하여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보라는 권유(勸誘)와 유혹(誘惑)의 손길도 많았지만, 그럴 때마다 "남편(男便)은 나라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나 하나의 행복(幸福)을 찾기 위해 재가(再嫁)하면 천벌(天罰)받는다."라는 말로 유혹(誘惑)의 손길을 물리치곤 하였다. 

정부(政府)에서 지급(支給)하는 연금(年金)을 매월(每月) 받을 때마다 전사(戰死)한 남편(男便)을 그리워하면서 남몰래 눈물짓는다는 임여사(林女史)는, 하나뿐인 딸을 훌륭하게 키워 출가(出嫁)시켰고, 지금은 구순(九旬)을 바라보는 시부(媤父)님 한 분만 모시고 장(壯)한 며느리 구실을 다하고 있는 그녀(女)는, "아가야 정말 고맙다. 내가 너에게 할 말은 그것뿐이구나."하는 시부(媤父)님의 따뜻한 격려(激勵), 그 한마디에 더욱 감동(感動)이 되어, 따뜻하고 정(情)다운 효심(孝心)을 시부(媤父)님에게 바치는 일을 어제도 오늘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예천군수(醴泉郡守)로부터 1963년(年)과 1978년(年) 두 차례에 걸쳐 장(壯)한 어머니상(賞)을 받기도 했던 효부(孝婦) 임여사(林女史)는, 누가 보나 자랑스러운 전쟁미망인(戰爭未亡人)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