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김숙진(金淑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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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회(1979년 4월 14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영주군 풍기읍
효부(孝婦) 김숙진(金淑鎭) 50세

김숙진(金淑鎭) 여사(女史) 어려운 가정(家庭)에서 태어나, 가까스로 국민학교(國民學校) 이상(以上)의 문턱은 넘어보지 못하고 자랐지만, 그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무형(無形)의 값진 유산(遺産)이 있었으니, 그것이 곧 "효도(孝道)와 우애(友愛)는 인(仁)의 근본(根本)"이라는 가훈(家訓)이었다. 

따라서 김여사(金女史)는, 어릴 때부터 부모(父母)님께 효도(孝道)하는 마음이 강(强)했고 동기간(同氣間)의 우애(友愛)는 물론 웃어른들이 대(對)한 공경심(恭敬心)도 놀라운 정도(程度)였다.  

그는 20세(歲) 되던 해에 황(黃)영창씨(氏)와 결혼(結婚)했는데, 시가(媤家)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대대(代代)로 내려온 가난과 증증시하(層層侍下)인 시조모(媤祖母)님, 시부모(媤父母)님 등 젊은 여성(女性)으로서 감당(堪當)해 내기엔 너무나 벅찬 일이었다. 가난으로 나날을 이어가던 중 시조모(媤祖母)님과 시부모(媤父母)님이 차례차례 로 병석(病席)에 눕게 되자, 그의 일손은 더욱 바빠졌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이 방(房) 저 방(房)을 번갈아 드나들며 정성(精誠)을 다해 병간호(病看護)를 하였다. 

어린 자식(子息)들을 돌보며 세 어른의 간병(看病)을 한다는 일은 참으로 힘겨운 일이었지만, 그는 묵묵히 해 내었다. 

짜증스럽고 힘겨워 내동댕이치고 싶은 충동(衝動)도 여러 번 느꼈지만, 그럴 때마다 김여사(金女史)는 자랄 때 친정(親庭)에서 가슴 깊이 새겨 준 가훈(家訓)을 연상(聯想)하면서, 모든 것을 인내(忍耐)와 노력(努力)으로 이겨 나갔다. 

그러나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지성(至誠)으로 봉양(奉養)했던 시조모(媤祖母)님과 시부모(媤父母)님 모두가 차례로 눈을 감으셨는데, 이번에는 남편(男便)마저 시름시름 앓으면서 병석(病席)에 눕게 되었다. 

남편(男便)의 병환(病患)으로 당장 생계(生計)에 더욱 위협(威脅)을 받게 된 김여사(金女史)는, 슬하(膝下)의 네 자녀(子女)의 앞날을 위해서도 굳세게 살아야겠다는 일념(一念)으로, 낮에는 들과 산(山)에서 나무를 해다가 팔기도 하고, 산(山)나물을 뜯어다가 그것을 들고 행상(行商)길에 나서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남편(男便)의 구환(救患)을 했는데, 병상(病床)에서 신음(呻吟)하는 남편(男便)과 함께 뜬눈으로 밤을 새울 때가 부지기수(不知其數)일 만큼 그의 정성(精誠)은 한없이 뜨겁기만 했지만, 끝내 남편(男便)도 일어나지 못하고 영원(永遠)히 불귀(不歸)의 몸이 되고 말았다. 

이제 가정(家庭)의 기둥까지 잃게 된 김여사(金女史)는, 매일(每日)같이 소복(素服)으로 단장을 한 후(後) 마음 속으로 남편(男便)의 넋을 달래며 슬픔에 찬 나날을 보내고 있다. 

가신 님을 위한 그의 정성(精誠)이 어찌나 지극(至極)한지, 비단 설과 한식(寒食), 추석(秋夕) 등 명절(名節)을 맞을 때 뿐만 아니라, 수시(隨時)로 산소(山所)를 찾아가서 가신님의 넋을 달래는 그의 갸륵한 마음은 하늘도 감동(感動)할 정도였다. 

특히 그는 슬하(膝下)의 어린 딸들에게도 

"다소곳한 가운데 절개(節介)를 지켜서, 바르게 움직이고 부끄러움을 지니고 행동(行動)하며, 마음과 행동(行動)은 언제나 맑고 고요하게 지녀야 한다."

는 말로 타이르는 예절(禮節)바른 여성(女性)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