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이영생(李英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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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회(1979년 4월 14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영일군 기계면
효부(孝婦) 이영생(李英生) 66세

김영생(金英生) 여사(女史)는 19세(歲)에 결혼(結婚)했는데, 시가(媤家)엔 위로 시조부모(媤祖父母)님을 비롯하여 시부모(媤父母)님, 그리고 시(媤)동생 3명(名)과 시(媤)누이 4명(名)등 자그마치 10명(名)이 넘는 대가족(大家族)이었으며, 맏며느리로서의 그의 짐은 너무나 무겁기만 했다. 

단 한 명(名)의 자녀(子女)도 두지 않은 채, 해방(解放) 전후(前後)의 어수선한 틈을 타 남편(男便)은 일본(日本)으로 훌쩍 떠나 버렸는데, 그 날부터 36년(年)이란 긴 세월(歲月)이 흘러간 지금까지 남편(男便)의 얼굴은커녕 그림자도 구경(求景) 못하면서 대가족(大家族)의 여장부(女丈夫)으로서 꿋꿋하게 살아오고 있다. 

간혹(間或)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남편(男便)의 생존소식(生存消食)을 유일(唯一)한 희망(希望)으로 삼으며, 청춘(靑春)과 인생(人生)을 송두리째 시가(媤家)를 위해 몸 바쳐 온 김여사(金女史). 

오늘은 시조부(媤祖父)님이 괜찮은가 하면, 내일(來日)은 시조모(媤祖母)님 차례였고, 시부모(媤父母)님도 예외(例外)는 아닐 정도(程度)로 눈만 뜨면 병(病)치레하는 일이 거의 하루의 일과(日課)였을 만큼,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는 형편(形便)이었다. 

어디 그 뿐이랴, 시(媤)동생과 4명(名)의 시(媤)누이에게도 고루고루 따뜻한 애정(愛情)을 나누어 주어야 했던 그는, 그야말로 대가족제도하(大家族制度下)의 맏며느리로서 온갖 역경(逆境)과 고난(苦難)을 이겨 왔으며, 피나는 노력(努力)과 헌신(獻身)으로 효(孝)와 열(烈)의 근본(根本)을 이행(履行)하여 부도(婦道)의 참 길을 굳건히 지켜 나갔다.

더우기 고혈압(高血壓)으로 기동불능(起動不能)인 시모(媤母)님에 대한 8년간(年間)에 걸친 극진한 간병(看病)은, 80년(年)의 긴 세월(歲月)과 맞먹을 정도(程度)로 어둡고 괴로운 나날이었으며, 이와 같은 역경(逆境)속에서도 7남매(男妹)의 시(媤)동생, 시(媤)누이를 모두 독립(獨立)시키고, 시조부모(媤祖父母)님의 제례(祭禮)까지 그의 힘으로 치러냈다. 

이제 김여사(金女史) 그 자신(自身)의 몸도 지치고 지친 나머지 쓰러질 정도(程度)로 피곤(疲困)했지만, 그러면 그럴 수록 "이제 나마저 쓰러지면 병(病)든 시모(媤母)님은 누가 돌보랴."하는 굳센 의지(意志)로, 그 자신(自身)을 채찍질 하면서 가정(家庭)을 지켜 나갔다. 

시모(媤母)님은 기동(起動)을 못하는 탓으로 용변처리(用便處理)에서부터 식사(食事)시중에 이르기까지 김여사(金女史)의 손길을 필요(必要)로 했다. 

어디 그 뿐인가. 매일(每日)같이 목욕(沐浴)을 시킬 정도(程度)로 시모(媤母)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보살펴 드렸다. 

그의 효성(孝誠)의 보람도 없이 시모(媤母)님도 타계(他界)하였고, 그 자신(自身)도 60세(歲)를 넘긴 노경(老境)에 접어들었는데, 단 하나의 남은 걱정은 고령(高齡)의 시부(媤父)님 일이다. 

비록 쪼들리는 가난이지만 노환(老患)으로 고생(苦生)하시는 시부(媤父)님을 위해서, 김여사(金女史)는 최후(最後)의 봉사(奉仕)라는 각오(覺悟)로 열(熱)과 성(誠)을 다해 봉양(奉養)하였다. 

슬하(膝下)에 핏줄 하나 없이 과부(寡婦)아닌 과부(寡婦)로 36년간(年間)을, 그리고 또한 47년간(年間)의 긴 시집살이는 대가족제도(大家族制度)의 폐단(弊端)과 남존녀비(男尊女卑) 사상(思想)이 몰고 온 비극(悲劇)의 생물(生物)이기도 하지만 그 녀(女)의 생각은 그렇지도 않았다. 

"옛부터 내려오는 우리 민족고유(民族固有)의 아름다운 미풍양속(美風良俗)일 뿐이라고 힘주어 말하는 김여사(金女史)는, 누가 보아도 위대(偉大)한 한국(韓國)의 여성상(女性像)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