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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선(金福先) 여사(女史)는 우리 민족(民族) 고유(固有)의 미덕(美德)이라고 할 수 있는 부도(婦道)를 성실(誠實)히 지켜 왔을 뿐만 아니라. 50평생(平生)을 오직 병(病)든 남편(男便)과 시부모(媤父母)를 위해 자신(自身)을 희생(犧牲)시켜 온 모범여성(模範女性)이다.
결혼 후(結婚後) 시부모(媤父母)을 공경(恭敬)하면서 그런 대로 신혼기(新婚期)를 행복(幸福)하게 보내고 있었는데, 6.25 사변(事變) 당시(當時) 남편(男便)이 제대(除隊)한 지 5년(年)만에 불운(不運)은 싹트기 시작했으니, 그것이 곧 뜻밖에 들이닥친 남편(男便)의 중풍(中風)이었다.
그렇잖아도 끼니조차 잇기가 어려운 가정형편(家庭形便)이었는데 중병(重病)까지 겹쳤으니, 김여사(金女史)는 더욱 암담(暗澹)해질 수 밖에 없었지만, 온갖 정성(精誠)을 다 기울여 병(病)구완을 위해 헌신노력(獻身努力)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노년(老年)하신 시부모(媤父母)님께도 조그만큼도 소홀함이 없도록 세심(細心)한 신경(神經)을 써서 따뜻하게 봉양(奉養)해 드렸다.
김여사(金女史)의 정성(精誠)을 하늘도 알아 주었던지, 남편(男便)의 병(病)도 다소(多少) 차도(差度)가 생겨 가벼운 활동(活動)을 하게 되었다.
그 모습을 본 김여사(金女史)는 마음 속으로 기쁨을 감추지 못하면서, 콩나물 장사로 여섯 식구(食口)의 생계(生計)를 꾸려 나갔는데 그 기쁨도 순간(瞬間)뿐이었다.
아직도 건강(健康)이 완전(完全)하지 못한 남편(男便)이 매일(每日)같이 술을 찾게 되었고, 그리고 과음(過飮)하는 날이면 온갖 행패(行悖)로 그의 마음을 괴롭혔지만, 김여사(金女史)는 조금도 남편(男便)을 원망(怨望)하는 일 없이, 남편(男便)은 곧 아내의 하늘이라는 부내부천(夫乃婦天)의 마음가짐을 지켜 나갔다.
그 후(後) 3,4년(年)이 경과(經過)하자, 남편(男便)은 이제 정신분열증(精神分裂症)까지 겹치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헛소리를 하는가 하면, 온 방안을 누비면서 어린애처럼 기어 다니는 등 병세(病勢)가 더욱 악화(惡化)되어 갔다.
엎친 데 덮친 격(格)으로, 시부모(媤父母)님도 차례차례로 병석(病席)에 누우면서 따뜻한 그의 간호(看護)를 기대(期待)하였다.
그의 밤낮없는 구완의 보람도 없이 몇 해를 사이에 두고 시부모(媤父母)님은 차례로 별세(別世)하시고 광기(狂氣)에 가까운 남편(男便)과 다섯 자녀(子女)만이 남게 되었는데, 생활(生活)은 더욱 말이 아닐 정도(程度)로 쪼들리기만 하였다.
정신병자(精神病者)에 가까운 남편(男便)의 광기(狂氣)는 날이 갈수록 갈피를 잡지 못할 정도(程度)로 극심(極甚)해져 갔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김여사(金女史)는 남편(男便)을 어린애처럼 달래면서 지성(至誠)으로 섬겨 왔다.
이와 같은 고난(苦難)속에서도 역경(逆境)을 극복(克服)한 보람으로, 장남(長男)은 고등학교(高等學校)를 거쳐 포항종합제철(浦項綜合製鐵)에 취업(就業)이 되었고, 차남(次男)은 중학교(中學校)에, 그리고 삼남(三男)은 국민학교(國民學校)에 재학 중(在學中)인데, 김여사(金女史)의 꿈은 슬하(膝下)의 다섯 자녀(子女)를 훌륭하게 키우는 것이 소망(所望)이라고 한다.
1977년(年) 5월(月) 어버이날엔 경상북도(慶尙北道) 지사(知事)의 모범(模範) 어머니상(賞)을 받을 만큼, 그가 걸어온 발자취는 자기희생(自己犧牲)이었고 남을 위한 거룩한 사랑 그것뿐이었다.
비록 김여사(金女史) 자신(自身)은 무학(無學)이긴 하지만, 자녀(子女)들에게는 "성실"(誠實)이란 두 글자를 가훈(家訓)으로 심어 주고 싶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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