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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여인은 23세 되던 해 장남인 김인수 씨와 결혼했다. 차도에서 3km나 떨어진 산중의 촌락 조그마한 초가집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초가집 한 채가 전 재산일 뿐인 찢어지게 가난한 시가였으나 며느리를 사랑스러워 여기는 시부모와 남편의 따뜻한 정, 형수를 몹시 따르는 시동생들을 위해 평생을 가난에서 벗어나는 데 바치기로 결심했다.
우선 깨끗한 몸과 마음이 무엇보다 밝은 생활의 기본이 된다고 생각해 남루한 시부모와 시동생들의 의복을 말끔히 빨아 항상 깨끗한 의복을 갈아주었으며 집 안 구석구석마다 쌓인 먼지와 오물들을 제거 비록 초가삼간이나마 항상 밝고 깨끗한 환경으로 바꾸었다.
남편과 함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쉽고 힘든 일을 구별하지 않으며 피나는 노력을 계속해 최저의 생계비를 제외하고는 단돈 10원의 낭비도 없이 반드시 저축하는 습성을 길렀다.
들판을 헤매 불모지를 개간하고 농가 수익을 높일 수 있는 일을 찾아내 매년 알뜰하게 저축한 결과 3년 만에는 비로소 4백 50평의 농토를 소유하게 되었다.
이에 힘을 얻어 더욱 아끼고 모은 돈으로 다음 2년 만에는 650평의 농토를 더 불렸으며 다음 5년 만에는 913평의 농토를 사들일 수 있게 되었다.
다시 3년 후에는 초가삼간을 아담한 기와집으로 바꿀 수 있게 가산이 늘어 13년 만에야 중농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동안 시동생 셋의 교육도 맡아 모두 훌륭히 교육시켜 결혼 분가케 했으며 3남매 자녀도 두게 되어 이웃 주민들이 놀랄 만큼 단란한 가정을 꾸몄다.
그러나 벼를 깎아 이룬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1969년 시아버지가 중풍으로 자리에 눕게 되면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중환자가 되고 말았다. 평소에도 시부모 모시기에 소홀함이 없었던 백 여인은 그날부터 시아버지의 병간호에 나섰다. 대소변 받아내기는 물론 의사소통까지 해야 했다. 집안 살림은 살림대로 해야 했으며 자녀의 양육도 있었으나 시아버지 곁에서 성심성의를 다한 간호를 했다.
시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진 지 4년 만에는 시어머니마저 같은 증세로 쓰러져 시부모 두 분이 모두 말도 못 하는 전신불수의 몸이 되어버렸다.
백 여인은 아예 시부모와 한방에 거처하면서 두 분의 손발이 되기를 서슴지 않았다. 식사 때면 일일이 떠먹여 드리고 여름이면 덥지 않을까 겨울이면 춥지 않을까 하여 아랫목에 하루에도 몇 번씩 손을 넣어 보고 군불을 알맞게 들이는 한편 방에서 나는 악취를 없애기 위해 대소변을 받아낼 때마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혀 드리며 방 안을 청소하여 청결하게 했다.
이웃 사람들이 문병을 오려 하다가도 두 노인이 누워있는 데다 마구 배설을 해 악취가 많을 것이라 꺼리고 외면하기 일쑤였으나 환자의 방에 가본 사람들은 오히려 보통 몸 성한 사람들이 기거하는 방보다도 청결한데 놀라곤 했다.
바깥일이나 부엌일을 하다가도 혹 노인들이 불편해하는 점은 없을까 하여 달려가는 백 여인 때문에 남편이 대신 식사 준비를 하는 일도 빈번했다.
노인들이 적적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윗동네 아랫동네에서 일어난 일들을 소상히 말씀드려 궁금증을 풀어드리고 밤잠을 거의 못 자면서까지 지성으로 보살펴 드렸다.
3남 2녀의 자녀 가정 교육도 철저해 5남매 모두 충효 사상을 제일로 아는 모범 학생들로 키웠으며 학교 교육도 힘닿는 데까지 뒷바라지했다.
연약한 여자의 힘으로 마른 일, 궂은일 가리지 않고 억척스레 일을 해내 초가삼간밖에 없었던 시가를 부농으로 키워 집안뿐만 아니라 이웃에도 '가난은 적'임을 주지시켜 한 푼이라도 저축하는 습관을 기르게 하였으며 험한 산골을 개간해 농토로 바꾸고 끼니 걱정 없는 농가를 만드는 데 힘을 다하였다.
언제나 얼굴에서 웃음 걷힐 날 없이 항상 밝은 표정으로 궂은일 마다 않고 억척같이 해 나가는 백 여인의 굳은 의지와 착한 성품은 누구나 본받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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