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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가정환경(家庭環境)으로 인(因)하여 겨우 국민학교(國民學校) 졸업장(卒業狀) 하나만으로 사회(社會)에 진출(進出)해야만 했던 고태수씨(高泰壽 氏)는, 목공기술(木工技術)로써 사회생활(社會生活)을 차곡차곡 닦아 나갔다.
그러나 막상 사회(社會)에 나와 보니 더 배우지 못한 것이 천추(千秋)의 한(恨)이 되었다.
목공(木工)일을 객지(客地)인 부산(釜山)에서 익히고, 어느 정도 재정적(財政的)인 기반(基盤)도 잡히게 되자 그는 고향(故鄕)으로 다시 돌아와서 마을의 등불 구실을 하기로 결심(決心)하였다.
고향(故鄕)에 돌아와서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이웃 돕기에 나선 고씨(高氏)는, 그 동안 면장(面長)의 감사상(感謝狀)과 7718부대장(部隊長)의 감사장(感謝狀), 그리고 국회의원(國會議員)의 표창장(表彰狀)을 받을 만큼, 사랑과 봉사 정신(奉仕精神)을 지성(至誠)껏 발휘(發揮)한 바 있는데, 몇 가지 실적(實績)을 살펴보면 가정 형편(家庭形便)이 어려워 상급학교(上級學校)에 진학(進學) 못하고 있는 고영민이라는 학생(學生)에게 입학금(入學金) 4만(萬)5천(千)원을 쥐어 주면서 "불행(不幸)에 굽히지 말고 오히려 용감(勇敢)하게 불행(不 幸)과 싸워 이기는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말하면서 학업(學業)에 대한 의욕(意慾)을 새롭게 고취(鼓吹)시킨 바 있다.
이에 용기(勇氣)를 얻은 고군(高君)은 더욱 열심(熱心)히 공부(工夫)하여 학교(學校)에서도 모범학생(模範學生)이 되었다고 한다.
1977년(年) 4월(月)에는 벌영1동(閥榮1洞) 경노회(敬老會) 기금(基金)으로 6만(萬)원을, 그리고 여노인회(女老人會)에 관광기금(觀光基金)으로 5만(萬)원을 내놓는 등 그의 정성(精誠)을 표시(表示)한 바 있었다.
또한 1977년(年) 10월(月)에는 이채도씨(氏)가 입원비(入院費)가 없어서 몇 달 동안 사경(死境)을 헤매고 있다는 사실(事實)을 마을 사람으로부터 전(傳)해 듣고, 5만(萬)원을 보조(補助)한바 있으며, 이 밖에도 성내 1동(洞)에 거주(居住)하는 맹세곤씨(氏)에게도 상당액(相當額)의 입원비(入院費)와 치료비(治療費)를 대주는 등 크고 작은 그의 미담사례(美談事例)는 너무나 많다.
특(特)히 그는 녕해면(寧海面) 예비군(豫備軍) 제1중대(第1中隊) 전투소대(戰鬪小隊) 막사공사(幕舍工事)가 자금난(資金難)으로 중단(中斷)되었다는 사실(事實)을 알고, 방위협의회(防衛協議會)에 찾아가 선뜻 100만(萬)원을 기증(寄贈)한 바도 있는데, 막사(幕舍)가 완공(完工)되던 날 그의 고마운 뜻에 보답(報答)하기 위하여 준공식(竣工式)에 참석(參席)했던 각급(各級)기관장(機關長)및 동민(洞民) 일동(一同)이 우렁찬 박수(拍手)로써 그의 환영(歡迎)한 바 있다 한다.
남달리 내 고장을 사랑하는 마음이 두터운 그는, 남을 도와 주는 손길도 두텁기만 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의 호주머니 사정(事情)까지 두터운 것은 아니었다.
비록 그 자신(自身)은 굶는 한(限)이 있더라도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대로 지나치지 못하는 천성적(天性的)으로 인정(人情) 많은 청년(靑年)으로서, 어머니에 대한 효성(孝誠)또한 지극(至極)하기만 했다.
평소(平素)에도 지극(至極)한 효자(孝子)로 이름난 그는, 특(特)히 어버이날에는 어머니를 등에 업고 마을을 한 바퀴 돌면서, 어머니 은혜(恩惠)에 감사(感謝)하는 그의 티없이 맑고 고운 표정(表情)은, 하늘에서 내려온 효자(孝子)만 같다는 것이 동리(洞里) 사람들의 한결같은 칭찬(稱讚)이었다.
어머니가 외출(外出) 길에서 귀가(歸家)할 무렵이면, 먼 곳까지 마중 나가서 정중(鄭重)히 손을 잡고 모셔오는 아름다운 동경(憧憬)만 보아도, 그의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을 한 눈으로 읽을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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