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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處女) 농군(農軍)으로 한 가정(家庭)의 기둥이 되어 심청(沈淸)이 못지 않게 효자(孝子) 구실을 다하고 있는 권순향낭(權順香娘)은 국민학교(國民學校)를 졸업(卒業)하자마자 부모(父母)님 밑에서 농사(農事)일과 가사(家事)일을 알뜰히 배워 가며 그런 대로 행복(幸福)하게 살아갔다.
그러나 그것도 일순간(一瞬間)일 뿐, 권양(權孃)이 18세(歲) 되던 해의 봄에 어머니가 갑자기 중풍(中風)으로 쓰러진 것이다.
그 몇 달 후(後)에 이 집안의 대들보 격(格)이었던 오빠마저 군(軍)에 입대(入隊)하고 보니, 아버지와 셋 동생들을 돌봐야 하는 무거운 책임(責任)이 한꺼번에 그의 두 어깨를 누르게 되었다.
이 때부터 정성(精誠)어린 그의 병(病)구완이 시작(始作)됐는데, 병(病)든 어머니를 등에 업고 20여리(餘理)가 넘는 한의원(漢醫院)을 드나들었는가 하면, 중풍(中風)에 좋다는 약(藥)이라면 눈보라가 치는 날이든 심산유곡(深山幽谷)이든 가리지 않고 헤매면서 끝내 찾고자 했던 약초(藥草)를 구(救)해다가 정성(精誠)들여 달여 드리는 등, 최선(最善)을 다하여 어머니에게 효성(孝誠)을 다 바쳤다.
하루에도 몇 차례에 걸친 대소변(大小便)의 처리(處理)는 물론,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따뜻하게 물을 데워서 깨끗하게 목욕(沐浴)을 시켜 드리기도 했다.
더욱 그는 매일(每日)같이 정화수(井華水)를 떠 놓고 어머니의 병(病)이 하루 속(速)히 완쾌(完快)되기를 두 손 모아 빌기도 했는데 '차라리 어머니의 병(病)이 자신(自身)에게 옮겨지고 대신(代身)어머니에게는 종전처럼 건강(健康)을 되돌려 주옵소서'하는 그의 간절(懇切)한 기도(祈禱)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시울을 뜨겁게 할 정도였다 한다.
그런데도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고나 할까. 아버지마저 병간호(病看護)에 지쳐 자리에 눕게 됐다.
양친(兩親) 모두 병상(病床)의 몸이 되면서 권양(權孃)의 몸은 두 개 세 개가 있어도 모자란 정도(程度)로, 그의 손길은 눈코 뜰새 없이 더욱 바빠지기만 했다.
끝내 그의 아버지는 권양(權孃)의 지극한 간호(看護)의 보람도 없이 화병으로 피를 토(吐)하시면서 타계(他界)하시었다.
이제 권양(權孃)에게 남은 것은, 900여평(餘坪)의 전답(田畓)과 계속繼續) 따뜻한 손길을 필요(必要)로 하는 어머니의 병간호(病看護), 그리고 동생들의 뒷바라지였지만, 그는 절망(絶望)의 빛을 조금도 나타내지 않고 농사(農事)일을 꾸려 가면서 또 한편으로는 효성(孝誠)의 날개를 더욱 활짝 펴 나갔다.
그리고 나날이 쪼들리는 어려운 가계(家計)는 삯바느질과 그 밖의 가내공업(家內工業)으로 메꿔 나가면서 힘겨운 현실(現實)을 극복(克服)해 나갔다.
1982년도(年度)에는 경북도지사(慶北道知事)의 효행상(孝行賞)을 받을 만큼 그의 아름다운 행적(行績)은,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전(傳)해져 제(第)2의 심청(沈淸)이라는 말까지 듣기도 했다.
웃어른을 지성(至誠)껏 섬기는 그의 마음씨는 동리(洞里)어른들로부터도 칭찬(稱讚)으로 모아졌는데, 특히 중풍(中風)으로 누워 계신 어머니 생신(生辰)때는 동리(洞里)노인(老人)들을 모셔다가 즐거운 하루를 보내시도록 하는 등 세심(細心)한 배려(配慮)도 아끼지 않았다.
동네 어른들이 "밤낮없이 병간호(病看護)만 하다가 시집은 언제 가겠냐?"고 묻기라도 하면, 그는 언제나 똑같은 말로 빙그레 웃으며 "나는 우리 어머이한테 벌써 시집갔심더… 지금껏 모르고 있었능교?"할 정도(程度)로 그의 일념(一念)은 자신(自身)의 결혼(結婚)보다는 어머니 병환(病患)의 완쾌(完快)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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