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양만학(楊萬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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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1978년 4월 27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영천군 화북면
효자(孝子) 양만학(楊萬壑) 75세

효자(孝子) 양만학옹(楊萬壑翁)은 영천(永川)보현산(普賢山) 아래의 두메산골에 살면서, 행정관청(行政官廳)에서 생계(生計)를 지원(支援)하여 주는 극빈자(極貧者)로서 생활보호대상자(生活保護對象者)이다. 

자신(自身)의 75세(歲)란 고령(高齡)을 무릅쓰고 93세(歲)의 노모(老母)님에 바치는 효행(孝行)을 보는 이마다 감탄(感歎)치 않은 아기 없다.

아침 일찍 일어나 노모(老母)가 주무시는 방(房)이 혹시 춥지 않을까 걱정하며, 하루 세 번의 끼니때마다 밥상머리에 앉아 진 반찬 마른 반찬 가려 잡수시게 하고, 기동(起動)이 불편(不便)한 모친(母親)의 일거일동(一擧一動)을 항상 보살피며 전념(專念)하였다. 

날마다의 평소(便所) 길에도 그때 그때마다 부축하여 망팔십(望八十)의 노효자(老孝子)가 망백세(望百歲)의 노모친(老母親)을 등에 업고 다니면서, 용변(用便)을 보시게 하는 등은 효친사상(孝親思想)이 땅에 떨어져 가는 오늘의 사회(社會)에서 보기 드문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어쩌다 모친(母親)이 병환(病患)으로 자리에 눕게 되면, 빈한(貧寒)한 가정형편(家庭形便)에서도 동분서주(東奔西走)하면서 약(藥)값을 구(求)하여, 좋다는 명약(名藥)이 있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구(求)해다 드릴 뿐 아니라, 75세(歲)의 할아버지가 93세(歲)의 어머니를 직접 업고 명의(名醫)를 찾아, 경주(慶州).대구(大邱)등지(等地)를 다니면서 진맥(診脈)을 하고 침(鍼)을 맞힌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느 때는 한약(漢藥)을 지어와서 효자(孝子) 양옹(楊翁)이 부엌에서 손수 불을 피워 약(藥)을 달이다가 노쇠(老衰)에다 과로(過勞)가 겹쳐, 불 앞에 쓰러져서 팔에 화상(火傷)을 입고 고생한 일도 있었다. 

모친(母親)이 자리에 누웠을 때에는 양옹(楊翁)이 직접(直接)부엌에 들어가서 손수 밥을 짓고 어머니의 식성(食性)에 맞고 또 좋아하시는 음식(飮食)을 만들어 갖다 드리면서, 진지상(床)앞에서 어머님의 말벗이 되어 모친(母親)의 마음을 항상 즐겁게 해 드렸던 것이다. 

양옹(楊翁)의 장남(長男)이 서울에서 작은 구멍가게를 차려 어렵게 살고 있으나 부전자전(父傳子傳)으로 효심(孝心)이 역시 독실(篤實)하여, 그의 장남(長男)이 시골보다 생활양식(生活樣式)이 편리(便利)한 서울로 조모(祖母)님과 양친(兩親)을 모시려고 수차(數次)말씀 드렸으나, 그 때마다 양옹(楊翁)은 노친(老親) 시하(侍下)의 몸으로 늙으신 모친(母親)께서 서울 생활(生活)은 좋아하지 않으시니 상경(上京)할 수 없다고 거절(拒絶)하고서, 오늘도 모친(母親)의 만수무강(萬壽無疆)염원(念願)하면서 고향(故鄕)을 지키고 있다. 

사람이란 늙으면 자기(自己) 일신(一身)도 귀찮아지는 법인데, 팔순(八旬)을 바라보는 고령(高齡)이면서도 자신(自身)은 돌보지 않고 자기(自己)를 낳아 길러 준 어머님에 대한 은혜(恩惠)의 만분(萬分)의 일(一)이라도 보은(報恩)해야겠다는 일념(一念)으로, 평생(平生)을 일관(一貫)하여 살아온 양(楊) 효자(孝子)의 효행(孝行)이야말로, 오늘을 살고 있는 젊은이들의 사표(師表)요, 만인(萬人)의 귀감(龜鑑)이라 아니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