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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고등학교(永川高等學校) 3학년(學年) 재학중(在學中)인 정기용군(鄭基容君)은 동리(洞里)에서도 소문난 효자(孝子)로서 그 이름이 높다.
6남매(男妹) 중(中) 3남(男)으로 태어난 정군(鄭君)은, 어릴 때부터 외출(外出)할 때는 반드시 말씀을 드리고 나가고, 또한 귀가(歸家)했을 때도 반드시 어버이 앞에 나서서 다녀왔다는 "출필고 반필면"(出必告 反必面)의 예의범절(禮儀凡節)을 철저(徹底)하게 지킬 정도로 꼬마 효자(孝子)라는 칭찬(稱讚)을 들어왔다.
부모(父母)님이 허약(虛弱)하시다는 것을 인지(認知)한 정군(鄭君)은 고심(苦心) 끝에 토끼를 사육(飼育)하여 포신용(捕身用)으로 드렸는가 하면, 어린 동생들에게는 부모(父母)님에게 절대(絶對)로 걱정 드리는 말이나 행동(行動)은 일체 삼가야 한다고 제법 어른스럽게 타이르는 등, 효자(孝子)의 본보기를 실천(實踐)을 통해 보여 주기도 했다.
정군(鄭君)은 근검절약정신(勤儉節約精神)도 대단했는데 그 비근한 예(例)로, 부모(父母)님께서 주시는 통학용(通學用) 버스비(費)는 송두리째 저축(貯蓄)을 하고 먼 길을 도보(徒步)로 통학(通學)했는가 하면, 밤에는 대여섯 명(名)의 학생(學生)을 모아놓고 과외공부(課外工夫)를 가르쳐, 거기서 얻어진 수입(收入)으로 공납금(公納金)을 마련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힘으로 산양(山羊) 2쌍(雙)도 마련해서 그것을 저축(貯蓄)의 뿌리로 삼고 있기도 한데, 정군(鄭君)은 평소(平素)에도 어찌나 부지런한지 한참 일손이 바쁜 농번기(農繁期)에는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손이 부족(不足)한 농가(農家)를 위해 원병(援兵) 구실을 톡톡히 해내기도 했다.
정군(鄭君)은 비단 부모(父母)님이 대(對)해서만 효도(孝道)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동리(洞里) 안팎의 웃어른에 대해서도 뜨거운 존경심(尊敬心)으로 대해 드렸다.
특히 그는 장날이면 장터로 뛰어가서 노인(老人)들이 들고 가는 무거운 짐을 손수 되맡아 어깨에 둘러메고, 공손히 자택(自宅)까지 모셔 드린 일이 불지기수(不知基數)였고, 어떤 때는 동리(洞里)에서 급(急)한 환자(患者)가 생겼을 때는 그가 솔선(率先) 나서서 환자(患者)를 등에 업고 읍내 병원(邑內病院)까지 달려가는 인간(人間) 앰블런스 구실을 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또한 정군(鄭君)은 동리(洞里)에서 학생지도자(學生指導者)라는 명예(名譽)를 지니기도 했는데,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는 간혹 마을 학생(學生)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자식은 부모의 분신이요(子息은 父母의 分身) 부모는 자식의 전신(父母는 子息의 前身)인 즉, 나의 오늘 있음이 누구의 덕분(德分)이며 누구로 인연(因緣)해서 태어났는가? 부모(父母)로 인연(因緣)해서 내가 태어났고 부모(父母)가 있으므로 내가 존재(存在)하지 않았는가. 따라서 부모(父母)는 우리들의 생명(生命)의 모체(母體)로서 그 크고 높은 은덕(恩德)을 잊어선 안 된다."는 그 나름대로의 효도관(孝道觀)을 역설(力說)하는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정빈곤(家庭貧困)으로 중학(中學)에는 가지 못하고 독학(獨學)으로 공부하여 검정고시(檢定考試)를 거쳐 고등학교(高等學校)에 입학(入學)한 자랑스러운 정군(鄭君), 한 때 그의 어머니가 중환(重患)으로 2개월간(個月間) 병상(病床)에 누워 계실 때는, 손수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기도 한 그의 갸륵한 효심(孝心) 하나만 보아도 출중(出衆)한 효자(孝子)라는 것을 알 수 있겠다.
학교(學校)에서 글짓기를 할 때는 으례 효(孝)를 주제(主題)로 글을 쓴다는 정군(鄭郡)은, 학급내(學級內)에서도 부지런하고 착한 학생(學生)으로 통(通)할 정도로 모든 학우(學友)들의 모범(模範)이 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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