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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孝子)로 소문(所聞)난 원수조씨(元壽祚氏)는 6남매(男妹)의 막내로 태어나 찢어지는 가난 속에서 어린 시절(時節)을 보냈다.
그가 9세(歲)때 부친(父親)이 별세(別世)하였고, 그 불운(不運)으로 인하여 원(元) 효자(孝子) 국민학교(國民學校) 3년(年)을 중퇴(中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막내아들이면서 68세(歲)의 노모(老母)를 극진하게 모시고 있는 그는, 자신(自信)은 보리죽으로 연명(延命)하면서도 형(兄)들에게는 몇 가마의 쌀을 꾸어다가 생계(生計)에 보탬이 되게 하는 등 형(兄)들에 대(對)한 공경심(恭敬心)도 대단하였다.
원씨(元氏)의 어린 시절(時節)은 너무나 불행(不幸)하였다.
행상(行商)길에서 어머니가 근(近) 7개월(個月) 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자, 이들 3남매(男妹)는 매일같이 눈물로 세월(歲月)을 보내면서 굶주림에 시달렸던 것이다.
백방(百方)으로 수소문(搜所聞)끝에 마침내 어머니를 다시 찾은 이들은, 다시는 어머니와 헤어지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하면서, 그날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는 등 원씨(元氏)가 걸어온 어린 시절(時節)은 문자(文字) 그대로 논물의 가시밭 길이었다.
그 후(後)로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 속에서 성장(成長)한 그는, 자신(自身)이 어머니를 모시기로 마음먹고 그날부터 보다 더한 효심(孝心)을 다하기 시작하였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 결혼 후(結婚後) 3개월(個月)만에 간경화증(肝硬化症)에 걸린 원씨(元氏)는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대학병원(大學病院)에서 낮이나 밤이나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으로 간호(看護)를 해 주신 어머니의 은혜(恩惠)를 잊을 수 없기에, 그는 효심(孝心)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형선고(死刑宣告)나 다름없는 간경화증(肝硬化症), 그러나 하늘도 무심(無心)치 않았던지 그의 병(病)은 호전(好轉)되어 완쾌(完快)한 몸으로 퇴원(退院)하게 됐던 것이다.
이 때부터 정성(精誠)을 다해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그의 갸륵한 효행(孝行)은 온 마을에 메아리쳐 효자(孝子) 집안으로 손꼽히게 됐다.
노령(老齡)의 어머니께서 말동무가 없을 때는, 재빨리 마을 노인(老人)들을 집안으로 모시고 와서 술 대접(待接)을 해 드리는가 하면, 수시(隨時)로 어머님을 모시고 나가서 이런저런 구경(求景)거리를 보여드리는 등, 어머니의 마음을 평안(平安)하게 해 드리는 그의 정성(精誠)은, 누가 보나 한 폭(幅)의 그림처럼 아름답기만 하였다.
원씨(元氏)는 비록 국민학교(國民學校) 중퇴(中退) 정도의 교육(敎育)밖에는 받지 못했지만 "효자(孝子) 노부모(老父母) 봉양(奉養)함에는 그 마음을 즐겁게 해 드려야 하고, 그 뜻을 여기지 않으면 무엇보다 노부모(老父母)를 하여금 듣는 것과 보는 것이 즐겁도록 해 드려야 하는 것이며, 특히 잠자리와 거처(居處)를 평안(平安)하게 해 드림과 아울러 좋아하는 음식(飮食)을 정성(精誠)껏 장만하여 봉양(奉養)해 드려야 한다"는 증자(曾子)의 말을 입버릇처럼 읊는 것을 보면 증자(曾子)의 열열(熱烈)한 숨은 숭배자(崇拜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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