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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아홉 살의 어린 나이로 시집을 와서 37년간(年間)을, 시조모(媤祖母)님과, 시부모(媤父母)님, 그리고 시(媤)동생 등 자그마치 13명(名)의 대가족(大家族)을 위해, 자나 깨나 웃음꽃을 피워 준 갸륵한 여인(女人)이 있으니 그가 바로 김영희(金永凞) 여사(女史)이다.
결혼(結婚) 당시(當時)의 남편(男便) 한영식씨(韓永植氏)의 가산(家産)은 고작 전답(田畓) 600여과(餘坪)과 초가(草家) 3간(間)이 전부였다.
너무나 비참(悲慘)한 생활환경(生活環境)을 그대로 볼 수만 없었던 김여사(金女史)는, 달콤한 신혼(新婚)의 꿈도 아랑곳 않고 품팔이나 산나물을 캐서 장에 내다 파는 일 등으로 가계(家計)를 돕는 한편, 일손 틈틈이 시조모(媤祖母)님과 시부모(媤父母)님을 위해 따뜻한 효심(孝心)을 아낌없이 바쳤다.
특(特)히 6.25 동란 중(動亂中)에는 시조모(媤祖母)님을 등에 업고 50여리(餘里) 피난(避難)길에 나서기도 했으며, 평소 식사(食事)때마다 치아(齒牙)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모든 음식물(飮食物)은 부담(負擔)없이 마음 놓고 씹을 수 있도록 하는 세심(細心)한 배려(配慮)는 물론, 건강(健康)은 마음으로 지킬 수 있다는 생각으로, 언제나 잠자리에 들기 전(前)에 먼저 시조모(媤祖母)님의 이부자리를 따뜻하게 펴 드리는 등, 이런 일들을 수 10년(年) 동안 하루같이 실천(實踐)해 왔다.
또한 시(媤)동생이나 자식(子息)들에게는 "효(孝)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行動)을 통해서 하는 것이다."라고 이르면서 교훈(敎訓)을 자신(自身)이 몸소 실천(實踐)을 통해서 가르쳐 왔다.
시조모(媤祖母)님께서 시력(視力)과 그 밖의 건강(健康)이 점차 좋지 않아지자, 김여사(金女史)는 몸에 좋다는 약초(藥草)를 캐기 위해 심산유곡(深山幽谷)을 헤매기도 했으며, 어려운 보릿고개 때만 해도 모든 식구(食口)들은 나물이나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延命)해 갔지만, 시조모(媤祖母)님께만은 쌀죽을 쑤어서 드리는 알뜰한 정성(精誠)을 바쳤다.
어느 추운 겨울날, 마침 그 날은 눈보라까지 휘몰아치던 엄동설한(嚴冬雪寒)이었는데, 시조모(媤祖母)님께서 갑자기 추어탕이 먹고 싶다고 하시는 말씀에, 김여사(金女史)는 그 길로 논바닥으로 뛰어나가 얼음장을 깨고 미꾸라지를 잡아다가 추어탕을 끓여 드렸다는 것이다.
예기(禮記)에 담긴 진리(眞理) 그대로 "부모(父母)를 섬기는 데는 은근함이 있어야 하며, 간섭(干涉)하시는 일이 있어도 부모(父母) 뜻을 뜻을 거스르지 않아야 하며, 특히 봉양(奉養)함을 위해서는 그 방향(方向)을 가리지 않고 사방(四方)을 뛰어다니며 애써야 한다."는 것을 김여사(金女史)야 말로 몸소 실천(實踐)을 통해서 보여 준 효(孝)의 표본(標本)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라고 했듯이, 김여사(金女史)의 극진한 효행(孝行)의 보람이 있어 시조모(媤祖母)님은 천수(天壽)를 다하시어 109세(歲)로 세상(世上)을 떠나셨고, 지금은 시모(媤母)님을 위해 더욱 새로운 맘으로 효행(孝行)을 다하고 있다.
이제 그 자신(自信)도 지명(知命)의 고개를 앞두고 있지만, 웃어른을 공경(恭敬)하는 마음은 더욱 굳어져 가고 있고, 무엇보다도 100세(歲)가 넘는 장수(長壽)를 하신 시조모(媤祖母)님을 왕(王)이야 금(金)이야 할 정도로 지성(至誠)껏 보셔왔으나, 반드시 하늘에서도 어떤 보상(報償)이 내려질 것이라며 동리(洞里)에서의 칭송(稱頌)은 대단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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