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곽판수(郭判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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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1978년 4월 27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고령군 성산면
효부(孝婦) 곽판수(郭判守) 61세

곽판수(郭判守) 여사(女史)는 한말(韓末)의 대학자(大學者) 곽종석(郭鍾錫) 선생(先生)의 친척(親戚)으로, 예로부터 열녀(烈女)와 효부(孝婦)의 고장이라 일컬어지는 현풍(玄風)에서 태어나, 18세(歲) 때, 충신(忠臣)으로 순절(殉節)한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 선생(先生) 후손(後孫)인 김항규(金恒圭氏)와 결혼(結婚)하였다. 

양가(兩家)모두 나무랄 데 없는 훌륭한 가문(家門)이었지만, 천수답(天水畓) 600평(坪)의 토지(土地)가 김가산(金家産)인 남편(男便)의 가정환경(家庭環境)은 적빈(赤貧) 그것이었다. 

더우기 위로는 시부모(媤父母)님과 아래로는 7남매(男妹)의 많은 식솔(食率)을 거르러야 하는 괴로움은 이루 다 형언(形言)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세상(世上)이 다 아는 선비집 가문(家門)인지라, 시부(媤父)님과 남편(男便)은 밤낮없이 책 속에 파묻혀 세월(歲月) 가는 줄 몰랐으니, 번번히 출입(出入)하는 과객(過客)접대(接待)의 시중을 하랴, 농사(農事)일을 꾸려가랴, 그야말로 북치고 나팔 부는 격(格)으로 곽여사(郭女史)의 마음은 바쁘고 괴롭기만 했지마는, 그는 단 한 번도 이를 내색(內色)하지 않고 가문(家門)의 명예(名譽)를 지키는 데 온갖 정성(精誠)을 다 기울였다. 

세월(歲月)은 흘러 1950년(年) 시부(媤父)께서 우연히 득병(得病)하시자, 곽여사(郭女史)는 온갖 명약(名藥)을 구(求)해다 그리는 등, 정성(精誠)을 다 바쳤지만 끝내 세상(世上)을 떠나시고 말았는데, 마침 그 무렵 6.25 동란(動亂)까지 겹쳐 이들의 생활(生活)은 더욱 궁핍(窮乏)해져 갔다. 

그러나 남편(男便)은 전쟁(戰爭)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단 하루도 빠지는 일 없이 새벽마다 성묘(省墓) 길에 나섰고, 곽여사(郭女史)는 그 나름대로 조석상식(朝夕上食)을 위해 정성(精誠)을 다 바쳤다. 

그러던 중 6.25동란(動亂)으로 불타 버린 빈소(殯所)를 다시 만들 때, 동네 사람들이 "殯所"란 다시 만드는 것이 아닐세"하면서 강력하게 말렸지만, 끝내 그는 다시 빈소(殯所)를 만드는 성의(誠意)를 다했는데, 웬 일인지 반년(半年)이 못되어 남편(男便)은 병상(病床)의 몸이 되고 말았다. 

온갖 약(藥)으로 남편(男便)의 건강(建康)을 되찾아 보려고 했지만, 모든 것이 허사(虛事)여서 끝내는 손가락을 깨물어 선혈(鮮血)을 입 속으로 주입(注入)시키는 등 성력(誠力)을 다 해 보았으나 다시 돌아 올 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았다. 

그때 곽여사(郭女史)의 나이는 불과(不過)33세(歲)였다. 

3남(男) 2녀(女)의 자녀(子女)와 시모(媤母)님, 그리고 그에 따른 형제(兄弟)들의 다권솔(多眷率)의 생활(生活)과 여러 차례인 불행(不幸)으로 쌓이고 쌓인 부채(負債)등, 곽여사(郭女史)에게 돌아온 것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絶望)뿐이었지만 곽여사(郭女史)는 그러면 그럴수록 이를 악물고 시모(媤母)님을 더욱 극진(極盡)히 봉양(奉養)하면서, 품삯일과 행상(行商)등으로 어려운 살림살이를 도맡아 꾸려가는 한편, 5남매(男妹)를 올바르게 키워 나가는데 온갖 심혈(心血)을 기울였다. 

돌아가신 시부(媤父)님과 남편(男便)의 빈소(殯所) 두 개를 만들어 놓고, 조석상식(朝夕上食)을 올리는 그는 정성(精誠)이 마침내 온 고을에 메아리쳐 고령군수(高靈郡守)의 표창장(表彰狀)까지 받은 바 있는 곽여사(郭女史), 그는 표창(表彰)을 받고 나서 동리(洞里) 어른들을 한 자리에 모셔 놓고 즐겁고 흥겨운 경로(敬老)장치를 베풀기도 했는데, 지금은 자녀(子女)들도 모두 성장(成長)해서 곽여사(郭女史)가 깊이 심어 놓은 경로효친(敬老孝親)의 뿌리를 굳건히 지켜 나가는 데 앞장서고 있다.

그 어머니에 그 자녀(子女)들이라고나 할까, 오죽했으면 동리(洞里)에서 그들의 기특한 행실(行實)을 가리켜 아름다운 무지개를 보는 것 같다고 말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