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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이(金元伊) 효부(孝婦)는 시부(媤父)가 병환(病患)으로 문(門)밖 출입(出入)을 못하는 집에 민며느리로 와서 물중걸식(門中乞食)을 하며 6세(歲)의 어릴 때부터 시부모(媤父母)님의 시중을 들면서 살아왔다.
그런데, 시모(媤母)님의 병세악화(病勢惡化)로 15세(歲)때 결혼(結婚)했는데, 부군(夫君)은 일본인(日本人)이 경영(經營)하는 숯 공장(工場)에 다니며 돈을 벌고, 김여사(金女史)는 시모(媤母)님을 도와 길쌈과 공품(工品) 생산(生産) 등들 하다가 수입(收入)이 시원찮으므로, 묵과 청포, 떡 등을 만들어 팔아서 시부모(媤父母)님을 받들고 생계(生計)를 이어나갔다.
부군(夫君)이 숯 공장(工場)에서 일하다 우연(偶然)히 병(病)을 얻었기에, 온갖 정성(精誠)으로 구환(救患)하였으나 4년 후(年後)에 끝내 별세(別世)하고 마니. 19세(歲)에 청상과부(靑孀寡婦)가 된 김여사(金女史)는, 살아갈 길이 더욱 막막(漠漠)하기만 하였던 것이다.
농가(農家)이었음에도 농토(農土)가 없기에 마을 뒤에 산전(山田) 600평(坪)을 개간(開墾)하여 2년(年)을 농사(農事)지었는데 이도 역시 산주(山主)에게 빼앗기니, 이 때부터 개간(開墾)은 단념(斷念)하고 이웃 농가(農家)의 삯일로 가계(家計)를 이어나갔다.
6.25 사변(事變) 떄 화병중(臥病中)인 시부(媤父)님을 업고 산골 마을로 피난(避難)을 가서 간병(看病)에 열중(熱中)하던 중, 주위(周圍)사람들의 이야기로 사림의 뼈 인골(人骨)가 시부모(媤父母)님의 병(病)에 좋은 약(藥)이 된다는 말을 믿고, 전쟁(戰爭)이 휩쓸고 간 문경군(聞慶郡) 어느 산골짜기에서 구(求)하여 약(藥)을 만들어 드렸더니, 신기(神奇)하게도 완쾌(完快)되었고 그 후(後) 83세(歲)를 형수(亨壽)하였다.
그 후(後) 시모(媤母)님께서 우연(偶然)히 안질(眼疾)을 얻었는데 결국(決局) 실명(失明)하게 되었다.
좋다는 약(藥)을 다 써보았으나 백약(百藥)이 무효(無效)라서 한밤중에 백일기도(百日祈禱)를 올려 보기도 하면서 정성(精誠)을 다한 결과(結果), 천지신령(天地神靈)이 감응(感應)하였음인지 3개월 후(個月 後)부터 차츰 차도(差度)가 있더니 오래지 않아 회복(恢復)되어 광명(光明)을 되찾고 완쾌(完快)되었다.
그 후(後) 고부(姑婦)끼리 의(誼)좋게 협심노력(協心努力)한 결과 논밭 몇 마지기를 사들일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생활(生活)이 안정(安定)되니 일생(一生)을 병고(病苦)에 시달리다가 기세(棄世)하신 시부(媤父)님과 부군(夫君)이 불쌍하고 원통해서 기소(基所)에 석물(石物)을 올려 그 넋을 위로(慰勞)하고 명복(冥福)을 빌었다.
김여사(金女史)의 어린 효행(孝行)을 보는 이마다 칭찬(稱讚)을 아끼지 않았으니 이 어찌 출천(出天)이 효부(孝婦)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시모(媤母)님도 작년(昨年)에 85세(歲)로 별세(別世)하시까지에 극진(極盡)히 효양(孝養)하였다.
이와 같은 숨은 효행(孝行)이 널리 알려져서 1955년(年) 5월(月)에는 경북(慶北) 예천경찰서장(醴泉警察署長)으로부터 효부표창장(孝婦表彰狀)을 받게 되었고, 이어 김여사(金女史)의 선행사실(善行事實)은 널리 인정(認定)되어 1956년(年) 3월(月) 1일(日)에는 경상북도(慶尙北道)명륜회(明倫會) 예천군지부장(醴泉郡支部長)으로부터 선행표창장(善行表彰狀)을 받은 바 있음을 아울러 밝혀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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