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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금임(李金任) 효부(孝婦)는 상주군(尙州郡) 함창면(咸昌面)의 남후시씨(南厚詩氏)와 결혼(結婚)하였으나, 해방(解放) 직후(直後) 소백산맥(小白山脈) 남록(南麓)인 문경군(聞慶郡) 산북면(山北面) 석봉리(石鳳里)로 이사(移徙)하였다.
이사(移徙) 온 지 2년(年) 만에 6.25 사변(事變)을 만나 부군(夫君)은 군(軍)에 입대(入隊)하여 분전중(奮戰中) 아깝게도 전사(戰死)하였다.
원래(元來)가 가난한 집안이었는 데다, 남편마저 전사(戰死)하고 나니 가세(家勢)는 더욱 어려워졌다. 그런데 하늘이 도우심인지, 아미년 남씨(南氏) 문중(門中)의 가운(家運)이 좋아서 그러했는진 몰라도, 남편(男便)을 잃은 이여사(李女史)가 해산(解産)을 하고 보니 옥동자(玉童子)였다.
남경수군(南慶守君)이 바로 일비일희(一悲一喜)의 가문(家門)에서 유복자(遺腹子)로 태어났던 것이다.
이여사(李女史)는 남편(男便)을 잃은 비통(悲痛)에 굴(屈)하지 아니하고 굶주린 배를 움켜쥐어 가면서 시(媤)아버님을 극진(極盡)히 봉양(奉養)하고, 단 하나뿐인 혈육(血肉)을 훌륭하게 키우는 데 정성(精誠)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시부(媤父) 남극이씨(南極伊氏)가 뜻밖으로 중풍(中風)을 앓게 되었다. 근근 이어가는 살림살이에서 조금씩 절약(節約)하여 모은 돈으로 약(藥)값을 대면서 시(媤)아버님의 병간호(病看護)에 모든 심혈(心血)을 기울였다.
그러나 워낙 중(重)한 병세(病勢)라서 쉽사리 완쾌(完快)되지 아니하였다.
3년간(年間)을 병간호(病看護)로 일관(一貫)하다 보니 이여사(李女史) 자신(自身)도 지쳤겠지만, 시부(媤父)님의 병(病)을 고쳐야겠다는 일념(一念)으로 좋은 약(藥)이라 하면 어떻게 해서든지 구(求)하여 구료(救療)에 힘썼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더니, 마침내 시부(媤父)님의 병환(病患)은 차도(差度)가 있어 문(門)밖출입(出入)을 하게 되고 얼굴에 생기(生氣)가 돌게 되니, 이여사(李女史)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도 잠시였다.
그 기쁨이 5년(年)도 채 못되어 하늘같이 믿고 살던 시부(媤父)님이 갑자기 별세(別世)하였다.
이여사(李女史)는 자기(自己)의 봉친(奉親)이 정성(精誠)이 모자란 소치(所致)라 자책(自責)하고 단장(斷腸)의 비통(悲痛)을 느끼면서 예(禮)에 따라 장례(葬禮)를 치른 뒤 3년상(年喪)을 하루 같이 모시니, 이를 지켜보던 동리(洞里)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로부터 산북면(山北面) 일대(一帶)에서는 이여사(李女史)에게 효부(孝婦)라 하여 아낌없는 찬사(讚辭)를 보내게 되었다.
1961년(年) 6월(月) 6(日) 현충일(顯忠日)을 맞아 보건사회부장관(保健社會部長官)으로부터 표창장(表彰狀)을 받았다.
전몰군인(戰沒軍人)의 유족(遺族)으로서 생계(生計)의 지주(支柱)를 잃고 물심양면(物心兩面)으로 고통(苦痛)이 극심함에도 불구(不拘)하고 자립(自立)의 생계(生計)를 개척확립(開拓確立)하여 가정(家庭)을 건실(健實)히 지켜 왔음은 전쟁(戰爭) 미망인(未亡人)의 귀감(龜鑑)이 되기 때문이었다.
고생(苦生) 끝에 영화(榮華)가 있다 하더니. 유복자(遺腹子) 남경수군(南慶守君)을 잘 키워서 결혼(結婚)시켰더니, 지금은 외아들에 손자(孫子)가 둘이나 되어 남부럽지 않은 화목(和睦)한 가정(家庭)을 만들어 놓았다.
오늘도 효부(孝婦) 이금임(李金任) 여사(女史)는 어린 손자(孫子)들의 재롱을 락(樂)으로 삼으면서 후회(後悔) 없는 인생(人生)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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