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김삼순(金三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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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1978년 4월 27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성주군 월항면
효부(孝婦) 김삼순(金三順) 47세

6.25 동란(動亂)으로 인(因)해 결혼(結婚) 1년(年)도 채 못되어 전쟁(戰爭) 미망인(未亡人)이 되어버린 김삼순(金三順) 여사(女史), 그는 1949년(年) 10월(月)에 결혼(結婚)하여 다음 해인 1950년(年) 9월(月)에 남편(男便) 이승열 씨(李承烈氏)가 전사(戰死)했다는 비보(悲報)를 받은 불운(不運)의 여성(女性)이다. 

당시(當時) 시댁(媤宅)에는 고희(古稀)를 맞은 시조부모(媤祖父母)님을 비롯하여 시부모(媤父母)님이 계셨는데, 특히 시조모(媤祖母)님이 계셨는데, 특히 시조모(媤祖母)님은 중풍(中風)으로 몸져누워 있는 딱한 처지(處地)였다. 

김여사(金女史)는 남편(男便)의 비보(悲報)에 하염없이 흐르던 눈물이 마를 겨를도 없이, 병상(病床)의 시조모(媤祖母)님을 위해 헌신적(獻身的)인 병(病)시중을 아끼지 않았다.

대소변(大小便) 받아내기와 목욕(沐浴)시켜 드리기 등, 매일같이 되풀이되는 일을 불평(不平) 한마디 없이 해냈으며, 또한 95(歲)의 고령(高齡)으로 별세(別世)하신 시조부(媤祖父)님께서도 미년(未年)의 6~7년(年) 동안은 하체(下體)를 마음대로 쓸 수 없는 불자유(不自由)스러운 몸이었는데, 이때도 김여사(金女史)는 시조부(媤祖父)님의 손이 되고 발이 되어 죽은 남편(男便) 대신 진정(眞正)한 효(孝)를, 행동(行動)을 통해 보여 주었다. 

그가 해야 할 큰 일이 또 있었으니, 그것이 곧 품팔이 노동(勞動)으로 가계(家計)를 꾸려 나가는 일이었다. 

비단 시조부(媤祖父)의 뒷바라지뿐만 아니라, 이제 또다시 팔순(八旬) 고령(高齡)으로 접어든 시조모(媤祖母)님의 봉양(奉養)이었는데, 이 역시 시조부((媤祖父)님 받들어 모셔 온 것 이상(以上)으로 정성(精誠)을 다 기울이고 있다. 

슬하(膝下)에 자녀(子女)를 두지 못한 탓으로 조카를 입양(入養)시켜 고등학교(高等學校)까지 마치게 했는데, 지금은 그의 유일(唯一)한 외아들이 된 이재덕군(君) 당년(年) 18세(歲) 김여사(金女史)의 거룩한 인간애(人間愛)를 본받아 나름대로 효(孝)의 꽃을 알뜰히 가꿔 나가고 있다. 

비근한 예(例)로 김여사(金女史)가 품삯 일을 위해 집을 비웠을 경우, 입양(入養)한 아들이 이재덕 군(君)이 증조모(曾祖母)님의 일거수(一擧手)일투족(一投足)을 알뜰히 보살펴 '효부(孝婦) 집에 효자(孝子) 난다'는 말이 실감(實感)케 해 주고 있다. 

결혼생활(結婚生活)의 단꿈도 맛보지 못하고, 한평생(平生)을 시조부모(媤祖父母)님과 시부모(媤父母)님의 분신(分身)이 되어, 감사봉공(減私奉公)해 온 김여사(金女史)는 각계(各界)각층(各層)으로부터 많은 효부상(孝婦賞)을 받기도 했는데 성주군(星州郡) 월황면(月恒面) 단위조(單位組) 합장(合長)이 수여(授與)하는 표창장(表彰狀)을 비롯해서 성주군(星州郡) 월항면(月恒面) 노인회분회장(老人會分會長)의 표창장(表彰狀) 등 효부상(孝婦賞)을 한 몸에 받을 만큼 효(孝)의 뿌리를 깊이 내린 모범여성(模範女性)이라고 할 수 있겠다. 

"효(孝)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고자 할 때 가장 먼저 실천(實踐)해야 되는 사람의 도리(道理)"라고 하는 말은 깊이 음미(吟味)해 볼만한 값진 금언(金言)이었다. 

자기(自己)를 희생(犧牲)시켜 가면서 웃어른들을 내 몸 이상(以上)으로 봉양(奉養)해 온 김여사(金女史), 그녀(女)야말로 송사양생(送死養生)의 도(道) 즉(卽), 망자(亡者)를 잘 보내고 살아있는 사람을 잘 섬겨 온 효부(孝婦) 중의 효부(孝婦)라고 해도 과언(過言)은 아닐 성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