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윤한분(尹漢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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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1978년 4월 27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영양군 백비면
효부(孝婦) 윤한분(尹漢分) 33세

윤한분(尹漢分) 여사(女史) 살고 있는 곳은 태백산맥(太白山脈)의 준령(峻嶺) 해발(海拔) 1,229m 의 일월산(日月山) 중덕 한 가운데에 위치하여, 영양군(英陽郡)과 울진군(蔚珍郡)의 군계(郡界)로서 인구밀도(人口密度)가 매우 낮은 고냉지(古冷地)인 산간벽지(山間僻地)이다. 

부군(夫君)과 슬하(膝下)에 2남(男) 2녀(女)를 두고 있으며, 위로는 고희(古稀)가 된 시모(媤母)님과 55세(歲)의 시숙(媤叔)님을 봉양(奉養)하고 있는데 시모(媤母)님, 시숙(媤叔) 모두가 선천성(先天性) 정신박약자(精神薄弱者)이다. 

윤여사(尹女史)는 1964년(年) 당시(當時) 떠돌이 방랑생활(放浪生活)을 하고 있던 박영규(朴永圭氏)와 결혼(結婚)하여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숱한 고초(苦楚)를 겪어 왔다. 

윤여사(尹女史)의 시가(媤家)는 시모(媤母)와 시숙(媤叔)이 행정관청(行政官廳)에서 지급(支給)하는 극빈자(極貧者) 생활보호대상자(生活保護對象者)로서의 구호양곡(救護糧穀)으로 겨우 생계(生計)를 이어나가며 또한 마을 자체(自體)에서도 불쌍한 이들의 생활(生活)을 많이 보살펴 주고 있었다. 

윤여사(尹女史)는 어려운 떠돌이 생활(生活) 가운데서도 몇 푼씩 벌어 모은 돈으로 시가(媤家)를 도와 오다가 1969년(年)에는, 부군(夫君)을 끈질기게 설득(說得)하여 시가(媤家)와 합가(合家)하는데 성공(成功)하였고, 다 기울어져 가는 초가(草家)에서 누더기 옷을 걸치고 비참(悲慘)한 생활(生活)을 하고 있는 시모(媤母)님과 시숙(媤叔)을 더욱 극진히 보살피게 되었다. 

그렇게 살아오던 몇 해 후, 부군(夫君)은 가난한 가정(家庭)을 수습할 길이 없게 되니, 노모(老母)와 어린 자식(子息)들을 둔 채 또 방랑(放浪)길에 접어들게 되었고, 그 여(女)는 혼자의 몸으로 품팔이로써 자녀(子女)들과 시모(媤母)님과 시숙(媤叔)의 생계(生計)를 보살피게 되었다. 

작년(昨年)까지만 해도 잡초(雜草)우거진 마당에 기울어진 초가(草家)이 던 것을 1977년도(年度)부터 오지(奧地) 새마을 가꾸기 사업(事業)에서의 적극적(積極的)인 참여(參與)로, 지금은 집 안팎을 정리(整理)하고 가꾸어 아담하게 채색(彩色)된 담장 안에 말끔히 정리(整理)된 새집으로 변모(變貌)시켜 놓았다. 

이것은 윤여사(尹女史)의 피나는 노력(努力)과 정열(情熱)의 결품(結品)이라 하겠다. 

7년 전(年前) 시모(媤母)님의 병환(病患)이 깊어지게 되자, 시집올 때 가지고 온 은(銀)반지를 팔아 약(藥)을 지어다 시탕(侍湯)해 드렸는데, 그래도 회복(回復)이 어렵자 어디에서 들어서 한 일인지는 몰라도, 자신(自身)의 엄지손가락을 잘라 그 선혈(鮮血)을 시모(媤母)님에게 먹여 드린 순진(純眞)하고 갸륵한 구료(求療)에 시모(媤母)의 병환(病患)은 마침내 회복(回復)되니, 이런 정경(情景)을 지켜본 인근(隣近) 사람들은 입을 모아 윤여사(尹女史)의 효행(孝行)을 격찬(激讚)하였다. 

정신박약(精神薄弱)으로 세상(世上)을 알지 못하는 시모(媤母)님과 시숙(媤叔)을 불쌍히 여기면서, 품팔이로써 이들을 보살피는 천진(天眞)한 며느리의 지극(至極)한 효도(孝道)는, 비록 정신박약자(精神薄弱者)의 집안이기는 하지만, 자라나는 아이들 앞에서 행운(幸運)의 서광(瑞光)이 비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