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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구(鄭明球) 여사(女史)는 6.25 동란(動亂)으로 일생(一生)의 비극(悲劇)을 맞게 된 불우(不遇)한 여인(女人)으로서,결혼(結婚) 2년여(年餘)만에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남편(男便)의 전사통지서(戰死通知書)를 받았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절망(絶望)속에 빠진 그에게 안겨진 것은, 남편(男便)의 유일(唯一)한 핏줄인 외동딸 하나와 기분(氣分) 내키는 대로 노망기(老妄氣)를 부리는 시부(媤父)님, 그리고 어린 시(媤)동생에다 900여평(餘坪)의 손바닥만한 전답(田畓)이 있었을 뿐이었다.
어린 시(媤)동생은 등에 업어 키우고, 한편으로 외동딸은 안아서 그런대로 양육(養育)할 수 있었지만, 거의 정신착란증(精神錯亂症)에 가까운 시부(媤父)님의 분별없는 노망기(老妄氣)는, 젊은 미망인(未亡人)의 가슴을 하루에도 열두 번 울리기에 족(足)했다.
너무나 딱한 그의 처지(處地)를 눈여겨 본 동리(洞里) 아낙네들과 그를 아는 친지(親知)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재가(再嫁)하여 새 출발(出發)하는 것이 어떠냐는 권유(勸誘)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정여사(鄭女史)는 하늘이 내려준 운명(運命)대로 살겠다고 말하면서 이들이 제의(提議)를 한결같이 물리쳤다.
비록 불우(不遇)한 환경(環境)이긴 하지만 역경(逆境)을 딛고 굳세게 살아갈 것을 스스로 다짐한 그는, 그로부터 자그마치 22년(年) 오랜 세월(歲月)을 노망기(老妄氣)가 있는 시부(媤父)님 돌보기를 청춘(靑春)과 인생(人生)을 바쳐 버린 것이다.
말이 22년간(年間)이지 22년(年)이면 강산(江山)이 두 번이나 변(變)한다는 오랜 세월(歲月)이 아닌가?
이 기간(期間)에 벙어리 냉가슴 앓듯 눈물겨운 일도 많았는데, 몇 가지 지나온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 어떤 때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엄동설한(嚴冬雪寒)인데도 노망기(老妄氣)를 참지 못한 시부(媤父)님께서는 옷을 홀랑 벗어 버리고 온 마을을 돌아다니기도 했고, 또 어떤 때는 남의 집 장독에다 용변(用便)을 보는 등 말로다 형언(形言)할 수 없을 만큼 정여사(丁女史)의 심성(心性)을 괴롭혔지만, 그러나 그럴 때마다 그는 단 한 번도 짜증스러운 빛 없이 시부(媤父)님을 공손히 모셔다가 깨끗하게 목욕(沐浴)을 시킨 다음 옷을 갈아 입혀 드리고, 다시 시부(媤父)님께서 더럽혀 놓은 피해자(被害者)의 집을 일일이 찾아가 깊이 사죄(謝罪)하는 등, 효부(孝婦)의 미덕(美德)을 진실(眞實)한 행동(行動)으로 보여 주었다.
어느 해 여름 장마철에는, 잠시 집을 비운 사이에 시부(媤父)님께서 또다시 밖으로 뛰어나가는 바람에, 그를 뒤쫒아갔으나 찾을 길이 없어 밤이 새도록 마을 뒷산과 앞산을 헤맨 끝에. 가까스로 어느 동굴(洞窟)속에서 찾아낸 기막힌 이야기도 있다.
그때 밤새 쏟아진 폭우(暴雨)를 맞은 정여사(丁女史)는 독감(毒感)에 걸리게 되었으나, 자신(自身)의 병(病)은 아랑곳도 않고 다시 시부(媤父)님 봉양(奉養)에 진력(盡力)하였다.
이와 같은 어려운 환경(環境)속에서도 업어서 키운 시(媤)동생은 중학교(中學校)까지 졸업(卒業)시켰고, 또한 20세(歲)로 성장(成長)한 외동딸에는 고등학교(高等學校) 졸업상(卒業狀)까지 안게 하였다.
정여사(丁女史)의 숨은 일화(逸話)가 세상(世上)에 알려지면서 마침내 1976년(年)에는 보건사회부장관(保健會社部長官)의 표창장(表彰狀)까지 받아 영광(榮光)의 날을 맞기도 하였다.
“연로(年老)하신 노인(老人)들을 나의 부모(父母) 대(對)하듯 공경(恭敬)하라.” 바로 이 말은 정여사(鄭女史)가 외동딸과 시(媤)동생에게 새겨 준 가훈(家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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