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유춘도(柳春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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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1978년 4월 27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달성군 월배면
효부(孝婦) 유춘도(柳春道) 28세

3인(人)의 전사자(戰死者)를 가진 유족(遺族) 가정(家庭)에 시집은 유춘도(柳春道) 여사(女史)는 자신(自身)도 모르게 저절로 숙연(肅然)해결 때가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한 목숨만을 나라에 바친 것도 아니요, 자그마치 세 사람의 귀중(貴重)한 생명(生命)을 조국(祖國)을 위해 바쳤으니, 누가 들어도 머리가 숙어질 수밖에 더 있겠는가. 

전사자(戰死者) 유족(遺族)인 시가(媤家)에는 팔순(八旬)이 넘는 노시조모(老媤祖母)님이 계셨는데, 노환(老患)으로 기동(起動)이 불자유(不自由)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사용(使用)도 가리지 못할 정도로 밤낮없이 병상(病床)에 누워 있는 딱한 처지(處地)에 놓여 있었다. 

생계(生計)를 이어 준 것은 전답(田畓) 800여평(餘坪)이 전부(全部)였는데, 이것으로 자녀(子女) 4명(名) 등 6명(名)의 식구(食口)가 살아가기엔 너무나 힘겨운 일이었지만, 유여사(柳女史)는 조금도 실망(失望)하지 않고 낮에는 동리(洞里) 사람들의 세탁(洗濯)일과 애기돌보기 등, 손에 닥치는 대로 품삯일을 열심히 하여 어려운 생계(生計)를 힘겹게 이어 나섰다. 

한편으로는 기동(起動)이 불편(不便)한 시조모(媤祖母)님의 용변처리(用便處理)는 물론(勿論), 하루가 멀다고 할 정도로 목욕(沐浴)을 시켜 드린 다음, 깨끗하게 세탁(洗濯)한 새 옷으로 갈아 입혀 시조모(媤祖母)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렸다. 

뿐만 아니라, 노환(老患)에 좋다는 약초(藥草)를 캐기 위해 심산유곡(深山幽谷)을 헤매기도 했는데, 어느 날은 바위에서 뒹굴어서 죽을 고비도 겪었다 한다.

그리고 맛있는 음식(飮食)이 있으면 자녀(子女)들 몰래 숨겨 놓았다가 특별(特別)히 시조모(媤祖母)님에게만 드리는 등 그의 지극(至極)한 효심(孝心)은 대단하였다. 

특(特)히 유여사(柳女史)는 명예(名譽)로운 3인(人) 전사자(戰死者)의 유족(遺族)답게, 명종(名種) 경축일(慶祝日)에는 누구보다 솔선(率先)하여 국기(國旗)를 게양(揭揚)하는 바람에, 몇 년 후(年後)에는 온 마을에 너도 나도 앞다투어 국기(國旗)를 게양(揭揚)하는 좋은 풍조(風潮)가 심어졌다. 

오랜 옛날부터 부덕(婦德). 부언(婦言). 부용(婦容). 부공(婦功)이란 이 네 가지를 부도(婦道)로 여겨 왔는데, 유여사(柳女史)는 이 네 가지 교훈(敎訓) 중(中)에서 더러운 것을 깨끗이 씻고 의복(衣服)과 치장을 청결(淸潔)히 하며, 목욕(沐浴)을 자주 하여 몸을 더럽게 하지 않는 가르침을 생활신조(生活信條)로 삼고 평소 몸에 밸 정도로 실천(實踐)하고 있는 모범(模範) 주부(主婦)이기도 하다. 

그와 같은 그의 철저(徹底)한 생활신조(生活信條)가 바로 기동(起動)이 불자유(不自由)스러운 시조모(媤祖母)님에게 공경(恭敬)과 사랑으로 바쳐서 아름다운 효심(孝心)이 향기(香氣)를 뿌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슬하(膝下)에 네 자녀(子女)를 둔 유여사(柳女史)는, 틈이 있을 때마다 자녀(子女)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3인(人) 전사자(戰死者) 가족(家族)의 자랑스러운 긍지(矜持)를 지켜 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나라에 충성(忠誠)하고, 부모(父母)에게 효도(孝道)하면서, 예(禮)를 갖추는 참된 인간(人間)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力說)하는 알뜰한 어머니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