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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부(孝婦) 최봉선(崔鳳善) 여사(女史)는 1959년(年) 20세(歲)때에 가난한 농부(農夫)의 외아들 김윤석(金潤錫氏)와 결혼(結婚)하여 슬하(膝下)에 2남(男) 1녀(女)를 두고, 위로는 고희(古稀)를 맞은 노시모(老媤母)님을 모시면서 뼈를 깎는 어려운 가정형편(家庭形便)에도 구애(拘碍)않고 시모(媤母)님의 봉양(奉養)에 온갖 정성(精誠)을 다 기울이면서 살아왔다.
결혼(結婚)한 지 9년(年)째인 29세(歲) 꽃다운 나이에 남편(男便)과 사별(死別)하고 청상과부(靑孀寡婦)가 된 최여사(崔女史)는, 평생(平生)에 처음 겪어 보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슬픔을 당(當)하게 되었다.
일가친척(一家親戚)이라고 전혀 없는 그야말로 사고무친(四顧無親)의 적적(寂寂)한 집안에서 아무리 발버둥을 쳐 보아도 살아갈 길은 막막하기만 하였다.
견디다 못한 최여사(崔女史)는 친정(親庭)에 가서 도움을 청(請)했으나 출가 (出嫁)외인(外人)이라 하며 거절(拒絶)을 당(當)하게 되니, 울면서 발길이 돌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다.
주위(周圍)에서나 친지(親知)들로부터 그렇게 고생(苦生)하느니 차라리 개가(改嫁)하여 새 삶을 찾으라는 권유(勸誘)와 때로는 유혹(誘惑)도 숱하게 받았으나, 불쌍한 어린 자식(子息)과 불행(不幸)하게 된 늙으신 시모(媤母)님을 버리고 개가(改嫁)한다는 것은, 천벌(天罰)을 받아 마땅할 죄악(罪惡)이라고 여겨져서 그 때 그때마다 단호(斷呼)히 거절(拒絶)하였다.
이 때부터 어떤 고통(苦痛)과 역경(逆境)이 닥치더라도 자기(自己) 힘으로 살아갈 것을 굳게 결심(決心)하였다.
농사철에는 이웃 농가(農家)에서 품팔이를 하고 농한기(農閑期)에는 온갖 행상(行商)을 하면서 시모(媤母)님 봉양(奉養)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렇게 인고(忍苦) 속에서 살아오던 중, 1969년(年)에 시모(媤母)님이 갑자기 중풍(中風)으로 눕게 되자, 백방(百方)으로 애쓰면서 좋다는 약(藥)은 다 구(求)해서 지성(至誠)으로 시탕(侍湯), 구환(救患)한 결과 하늘이 감동(感動)하였음인지 병환(病患)이 차츰 낫게 되었다.
이 때부터 최여사(崔女史)는 평소 좋은 반찬, 좋은 옷을 못해 드린 것이 후회(後悔)되고 또한 안타깝게 여겨져서 사후(死後)의 삭망전(朔望奠)이나 제사(祭祀)보다는 오히려, 생전(生前)의 초하루 보름을 산(山) 삭망일(朔望日)로 정(定)하고 고기반찬 등을 대접(待接)하는 것이 바람직한 도리(道理)라고 깨닫고, 그 때부터 지금까지 10년(年) 동안에 걸쳐 생삭망전(生朔望奠)으로 정(定)하고 노시모(老媤母)님을 지극(至極)히 대접(待接)하며 모셔 왔다.
인근동민(隣近洞民)들도 ‘대밭집 며느리 최여사(崔女史)’라 하면, 효부(孝婦)로서의 높은 행실(行實)을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칭찬(稱讚)이 대단하다.
연약(軟弱)한 여자(女子)의 몸으로, 가난하고 어려운 흥건(興件) 속에서도 실망(失望)하지 아니하고 역경(逆境)을 극복(克服)하며, 한결같이 시모(媤母)님을 극진(極盡)히 모신 갸륵한 최여사(崔女史)의 행적(行績)은 효행은상(孝行恩想)의 본보기로서 뭇 사람들의 귀감(龜鑑)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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