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봉술(李鳳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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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1958년 3월 7일)
보화상(補化賞) 본상(本賞)
달성군(達城郡) 구지면(求智面) 고봉동(高峰洞) 367
효자(孝子) 이봉술(李鳳述) 44세 [본관(本貫) 전주(全州)]

『효경(孝經)』기효행(紀孝行) 장(章)에 이렇게 적고 있다. “거즉치기경(居則致其敬) 양즉치기락(養則致其樂) 병즉치기우(病則致其憂) 상즉치기애(喪則致其哀) 제즉치기엄(祭則致其嚴)” 즉 “계실 때는 공경을 다하고, 봉양에는 즐거움을 다하고, 병이 드시면 근심을 다하고, 돌아가시면 슬픔을 다하고, 제사에는 엄함을 다할지니라.”라는 뜻이다.

이봉술(李鳳述) 씨는 성년(成年)이 되어 숙모(叔母)의 양자(養子)로 들어갔으면서도 낳고 기르신 친모(親母)보다 더 극진히 양모(養母)를 섬겨 공자(孔子)의 다섯 가지 효행(孝行)을 실천한 효자(孝子)이다.

이씨가 미망인(未亡人)이며 자식이 없던 숙모(叔母)의 양자(養子)로 입적(入籍)된 것은 20세 때였다. 다섯 마지기의 농토로 생활에 불편 없이 살아가던 가정은 이씨가 양자로 들어간 지 10년 만에 갑자기 양모(養母)가 심한 관절염으로 쓰러지자 가세(家勢)가 기울기 시작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용하다는 약(藥)은 모두 구해 달여 드렸으나 병세(病勢)가 더욱 악화될 뿐이었으며 재산은 하루하루 줄어들기만 했다.

이 때 이씨는 재산을 축낼 것이 아니라 일본(日本)에 건너가 돈을 벌어 양모(養母)의 병을 치료해 보고자 결심했다. 일제(日帝)시대인 당시에는 본국(本國)의 부족한 인력(人力)을 충당하기 위해 한국(韓國)의 노무자를 값싼 임금(賃金)으로 모집해 끌고 갔었다. 이씨는 노무자로 자원해 일본(日本)에 건너간 후 굶주리고 헐벗으면서 오직 양모(養母)의 지병(持病)을 고치겠다는 일념(一念)으로 돈을 모아 보냈다. 결혼 3년 만에 남편을 일본으로 떠나보낸 후 혼자 시모(媤母)를 모시고 있던 부인 이씨는 남편의 양모(養母)에 대한 극진한 효성(孝誠)에 감동, 남편보다 더 알뜰하게 병든 노모를 공양했다. 李씨의 부인은 시모(媤母)의 병세가 차도가 없이 악화되자 정성이 부족한 탓이라고 스스로 자책한 후 매달 7, 17, 27일 3일간씩 정화수(井華水)를 떠놓고 “어머니 병환을 낫게 해 달라”는 기도(祈禱)를 올리기 시작했다.

부인의 기도가 3년 동안을 계속하자 하늘의 도움이었는지 시모의 병세가 호전되기 시작했으며 다음 해에는 일본(日本)의 남편으로부터 어머니의 병환을 일본에서 신약(新藥)으로 고쳐 보겠다며 일본에 들어오라는 편지가 왔다. 노모를 모시고 낯선 땅 일본에 도착한 부인은 남편이 그 동안 일본에서 열심히 모은 돈으로 어머니 지병(持病)을 치료하고 정성껏 공양한 결과 2년 만에 노모의 지병을 완치시킬 수 있었다.

해방(解放)과 함께 귀국한 李씨 가족은 고향에서 3년 동안은 건강한 노모를 모시고 행복한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신(神)은 李씨를 끝까지 지켜주지는 못했다. 당시 경상도(慶尙道) 지방에 만연됐던 장티푸스로 사망한 외숙부(外叔父)의 장례식에 다녀왔던 양모(養母)가 갑자기 열이 나면서 쓰러지더니 사흘 만에 손발을 쓰지 못하는 불구의 몸이 되고 말았다. 쇠약한 몸에 장티푸스가 전염돼 체력을 유지하지 못하고 중풍(中風)으로 쓰러진 것이다. 李씨 부부는 수족을 못 쓰는 양모(養母)가 불편이 없도록 밤낮으로 정성껏 보살피면서 전국의 유명한 의원(醫院)을 찾아다니며 양모(養母)의 회복에 필요한 치료약을 구해오곤 했으나 워낙 병세가 악화돼 치료가 불가능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다음 해에는 6.25사변이 터져 병든 양모(養母)를 등에 업고 피난길에 나서야 했다. 정처 없이 떠난 피난길은 병든 노모를 모신 李씨 부부에게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혼란의 피난길 속에서도 李씨 부부는 양모(養母)의 공양(供養)을 게을리 하지 않고 언제나 더운 음식을 구해 왔으며 잠자리도 불편이 없도록 빈방을 찾아 나서곤 했다. 피난 중의 李씨 부부의 효행(孝行)은 구복지양(口腹之養)으로만 그치지 않았다.

양모(養母)의 회복을 비는 기도를 하루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전쟁터의 산중을 헤매어 약초(藥草)를 구해 오기도 했다. 수복(收復) 후 힘든 피난살이에서 고향에 돌아왔으나 양모(養母)는 이씨 부부의 정성을 외면한 채 병세는 악화되기만 했다. 그 해 가을 정성 어린 효도(孝道)의 보람없이 양모(養母)는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마을 주민들은 양모(養母)가 돌아가시자 효자(孝子)의 마지막 정성을 도와주자며 마을 공동으로 화려한 장례식(葬禮式)을 치러 주었다.

李씨의 효행(孝行)은 이 마을 주민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으며 다음 해 마을 이름으로 李씨에게 효자비(孝子碑)를 세우기로 했다. 40 평생을 양모(養母)의 병간호에만 바쳐온 李씨의 효행은 경북(慶北) 도내(道內)에 널리 알려져 남대구(南大邱) 경찰서장은 자비(自費)로 李씨를 표창하기도 했다. 李씨의 효행(孝行)이 빛나는 것은 친부모가 아닌 양모(養母)를 모셨다는 점이다. 20년간 李씨 부부가 실천한 효행(孝行)의 길은 순수한 지성(至誠)의 발로(發露)여서 우리에게 더 큰 감명을 준다. 공자(孔子)는 효(孝)를 행인(行仁)의 근본이라고 하였으나 현시대에 양모(養母)를 친부모 모시듯이 효행(孝行)을 다하는 사람은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李씨는 현재 4남 1녀를 두고 있으며 자작답(自作畓) 1두락(斗落), 소작답(小作畓) 4두락(斗落)의 극빈한 생활을 하면서 사후(死後) 양모(養母)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을 효행(孝行)을 계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