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강희(徐康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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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1958년 3월 7일)
독행상(篤行賞)
달성군(達城郡) 논공면(論工面) 하동(下洞) 2구(區)
효자(孝子) 서강희(徐康禧) 42세

하동(下洞) 마을 사람들은 먼동이 트기 전 호롱불을 들고 강가에서 고기를 낚고 있는 서(徐)씨를 하루도 빠짐없이 발견할 수 있었다. 

폭우가 쏟아지는 한 여름철이나 강이 얼음으로 꽁꽁 얼어붙은 한 겨울철에도 그는 고기잡이를 쉬지 않았다. 한 끼라도 신선한 생선회가 밥상에 올려지지 않으면 부친(父親)은 식사를 하지 않았다. 부친(父親)을 섬기는 서(徐)씨의 효성(孝誠)은 이렇게 지극하고 정성을 다한 것이었다. 

부친(父親)은 부옥(副屋)을 두어 10여리나 떨어진 외진 산 속에 거처를 정하고 있었다. 

품팔이 생활로 겨우 끼니를 이어온 서(徐)씨는 늦도록 노동에 시달린 후에는 반드시 10여리 먼 길의 부친(父親)을 찾아가 문안(問安)을 올리고 그날의 치가행사(治家行事)와 바깥 세상에서 일어난 일들을 밤늦도록 알려드린 후 귀가하곤 했다. 

3년 전 부친(父親)이 별세(別世)하자 마을 사람들은 “이제 생선 값이 떨어지겠군” 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서(徐)씨의 생선(生鮮) 봉양을 칭찬했다. 그는 부친(父親) 사후(死後)에도 고제(古制)를 헐어내지 않고 예절을 다해 제사를 지냈으며 3년 동안이나 고기와 술을 끊고 부친(父親)에 대한 그리움을 곡(哭)으로 표현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서효자(徐孝子)로 이름을 고쳐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