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김한준(金漢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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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1967년 2월 23일)
보화상(補化賞) 본상(本賞)
고령군 다산면 벌지동
효자(孝子) 김한준(金漢俊) 58세

고대중국(古代中國) 후한(後漢) 시대 위제(韋帝)는 「충신(忠臣)을 구하려면 반드시 효자(孝子)의 가문에서 구하라(求忠臣 必於孝子之門)」라고 말했다. 

이 말은 충(忠)과 효(孝)의 정신이 근본적으로 일치한다는 뜻이다.

충(忠)과 효(孝)의 본바탕을 이루는 정신은 인(仁) 즉 인간적인 사랑이다. 

이 인간적인 어진 마음씨에 바탕을 둔 효(孝)는 자기를 사랑하는데서 출발하여 남을 사랑하는 충(忠)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주자(朱子)의 진기지위충(盡己之謂忠, 자기 자신에 최선을 다함) 추기지위서(推己之謂恕, 자기 자신을 미루어 남을 위함)라는 충서(忠恕)의 해석은 충(忠)과 효(孝)가 일치한다는 원리를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웃어른을 공경하는 어진 사람은 반드시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심으로 충만 되어 있는 것이다. 

金씨의 효행(孝行)은 「효자(孝子)는 반드시 충신(忠臣)」이라는 충(忠)과 효(孝)의 관계를 우리 모두에게 입증시킨 본보기이다. 金씨는 부친(父親)과 사별(死別)한 13세 때부터 조부모(祖父母)와 모친(母親), 세 동생의 가장 노릇을 해왔다. 전통적으로 효(孝)의 관념이 뿌리 깊게 자리 잡은 가문에서 자란 그는 어린 나이였지만 웃어른들을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어진 마음을 행동으로 실천했다. 

특히 그는 아무리 힘든 고난이 닥쳐와도 불평 없이 행동으로 극복해온 과묵한 성격이었으며 하루 동안의 자기 언행(言行)을 밤에는 반드시 되새겨 보고 반성하는 정의로운 행동가였다.  

소년기에서 청년기를 거치는 동안 친지간이나 이웃사람들과 한 번도 시비를 벌인 일이 없는 과묵한 그의 성격은 군내에 널리 알려져 있는 일이다. 

이 같은 과묵한 성격에 비해 그는 의(義)로운 일에는 앞장서서 행동으로 실천하는 또 다른 일면의 성격을 갖고 있다. 

그의 의(義)로운 행동 가운데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약관 19세의 어린 나이에 문맹 퇴치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일제(日帝)시대 이 마을 주민들 중 글을 깨우친 주민은 5%에 불과했으며 95%는 문맹자였다. 그는 자기 집 사랑방에 간이학교를 설립, 정규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어린이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일경(日警)의 눈을 피해 한글을 가르쳤다. 

당시 마을 사람들은 그의 행동을 비난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을 만큼 그의 집념은 진지하고 열성적이었다. 

그는 후에 이 간이학교를 벌지(伐知)국민학교로 발전시켜 20여 년간 기성회장직을 맡아 오면서 우수한 시설을 갖춘 학교로 육성했다. 

그의 애국심(愛國心)은 해방(解放)과 함께 지칠 줄 모르고 폭발하기 시작했다. 천수답에 의지해 힘겹게 살아왔던 마을 주민들은 해방 이듬해 심한 가뭄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그는 아무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던 저수지(貯水池) 신설 작업을 구상, 마을 주민들을 설득했다. 

산 계곡을 막는 작업은 6개월의 긴 시간이 소요되고 막대한 자금이 소요돼 마을 주민들을 괴롭혔으나 그는 자기 전답 일부를 팔아서 자금으로 희사하면서까지 저수지를 완성했다. 이 저수지는 아직도 이 마을의 젖줄이 되고 있다. 

6.25사변 후에는 전국적으로 도벌(盜伐)이 극심해 아름답던 강산이 황무지로 변하고 있었다. 이 도벌의 횡포를 그가 소홀히 넘길 수는 없었다. 

그는 80%가 산으로 둘러 쌓여 있는 다산면(茶山面)만이라도 도벌의 횡포에서 막아보자고 면장을 찾아가 산림계 조직을 건의했다. 산림계는 도벌을 막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후에는 조림사업에 역점을 두어 다산면(茶山面) 일대의 산을 푸르게 가꾸었다. 그의 조림사업은 전국적으로 널리 소개 돼 두 차례에 걸쳐 모범 애림가(愛林家)로 선정, 표창을 받기도 했다. 

이제 그의 효행(孝行)을 소개하자. 그는 모친(母親)의 생활을 자기생활의 일부 속에 포함시켜 언제나 모친(母親) 곁에서 맴돌고 있다. 

외출할 때는 반드시 모친(母親)에게 알리고 돌아와서도 하루의 일과를 소상히 이야기 하면서(出必告 返必面) 노모(老母)를 위로했다. 

노모(老母)가 가정의 우환으로 식사를 소홀히 할 때는 그도 식사를 마다하고 노모(老母)에게 식사를 권하곤 했다. 

11년 전 노모(老母)가 중풍으로 쓸어졌을 때 그는 전국을 다섯 차례나 순회하면서 영약(靈藥)을 구해 왔다. 

끝내 회복이 되지 않자 그는 병든 노모(老母) 신체의 일부가 돼 노모 곁에서 하루 해를 보내곤 했다. 

노모(老母)와 함께 잠자리를 같이 하면서 대소변을 손수 받아냈다. 노모(老母)가 81세까지 장수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효성(孝誠) 때문이었다. 

金씨는 노모(老母) 사후(死後)에도 3년 동안을 두문불출하고 성실과 공경을 다해 제사를 모셨다. 

그는 좋아하던 술마저도 3년 동안 일체 끊고 매일 새벽 4시에 10리나 떨어져 있는 산소를 찾아 성묘했다.

아무리 많은 눈이 와 쌓여도 그는 산소 길을 말끔히 치워 놓았다며 폭풍이 몰아치는 날도 성묘를 빠뜨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