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박복수(朴福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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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1968년 3월 28일)
보화상(補化賞) 본상(本賞)
금릉군 조마면 신곡동
효부(孝婦) 박복수(朴福壽) 38세

시모 김오용씨(75세)는 5년 전부터 손발이 붓고 오그러드는 이상증세의 병을 앓아왔다. 

통증은 심하지 않았으나 움직이는데 많은 불편이 있어 시모는 언제나 병을 치료하지 못함을 비관했다. 

가난한 살림이어서 도시에 나가 입원 치료는 하지 못했지만 한약재를 구입하고 의사를 초빙해 자주 치료를 해왔다. 

병의 차도가 없자 박씨는 남몰래 밤마다 깨끗한 샘물을 떠나놓고 시모병을 완치 시켜 달라고 3년 동안이나 기도를 드리기도 했다. 

 지난 66년 9월 6일이었다. 그날은 시모가 유난히도 손발에 통증을 느끼는 듯했다. 정상보다 배가 굵게 퉁퉁 부어 오른 손발로 땅바닥을 내리치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는 것이었다. 시모는 '자식놈이 얼마나 못났으면 제 애미 병하나 고쳐주지 못하느냐'며 아들을 힐난했으나 남편은 가슴을 치며 도망가듯 집을 뛰쳐 나갈 뿐이었다. 시모 곁에서 부어 오른 손발을 주물러 주며 위로하고 있던 박씨는 문득 얼마 전 옆집 할머니가 들려주던 말을 기억해냈다. 

시어머니병은 불치의 병이라고 윗마을 한약방 할아버지가 말하더구먼. 그 병은 사람의 살을 끓여먹으면 고칠 수 있다는 거야' 당시 박씨는 이웃집 할머니 이야기를 흘리는 말로 넘겨버렸으나 이 날은 시모의 고통이 심할수록 그 말이 그녀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차차 안정을 되찾은 시모는 통증을 잊고 잠인 든듯했다. 

퉁퉁 부어 오그라든 시모의 손발을 내려다 보고 있던 박씨는 조용하게 시모의 방을 나와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날이 무디어진 식칼을 예리하게 갈았다. 그녀는 자기 살 일부를 시모에게 끓여 먹여 병을 완치시키겠다는 결심을 다시 한번 다짐한 후 치마를 걷어 올려 넙적 다리에 칼을 꽂았다. 

시뻘건 피가 샘솟듯이 쏟아져 나오자 공포와 아픔의 고통이 동시에 덮쳐 왔으나 전신의 힘을 다해 천천히 손바닥 반 크기 만한 살을 도려냈다. 살을 도려낸 자리에 된장을 처발라 피가 계속 나오지 못하도록 싸 맨 후 도려낸 넙적 다리 살을 약 탕에 정성스럽게 끓였다. 노루고기라고 속이고 시모에게 권하자 시모는 '이렇게 맛 좋은 고기는 처음'이라며 국물까지 말끔히 마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밭 일을 나갔다. 그러나 된장으로 싸맨 상처에서는 계속 피가 흘렀으며 견딜 수 없을 만큼 심한 통증이 덮쳐왔다. 3일 동안을 버틴 그녀는 결국 자리에 눕고 말았다. 

박씨의 효성을 모르고 있던 남편은 과로로 인한 감기 정도로 알고 견디어 보라며 이웃집 품삯 일을 나가자고 조르는 형편이었다. 

박씨의 효성이 남편에게 알려진 것은 5일 후였다. 혼자 견디어 내기 힘들었던 그녀는 결국 남편에게 자기 상처를 보이고 말았다. 

마을 주민들은 박씨의 효행을 처음에는 모두 놀라움과 무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곧 말로만 들어온 출천지인효가 바로 박씨를 두고 하는 말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고는 그녀의 효행에 감탄과 찬사를 보내는 것이었다. 

박씨 돕기 운동은 자연스럽게 그리고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박씨의 상처뿐만 아니라 시모의 병까지 무료로 치료해 주겠다는 독지가까지 찾아와 그녀를 격려했다. 

 박씨는 21세 때 이오도씨와 결혼했다. 재산이라고는 험한 산비탈에 1백여평의 화전이 전부인 가난한 남편은 하루 품팔이 생활로 가족을 이끌어가고 있었다. 결혼 전부터 부모를 극진히 봉양해 온 효녀였던 그녀는 결혼 후에도 시모 봉양에 정성을 다했다. 그녀는 남의 집 김매기, 품삯과 삯바느질로 가계를 도우면서 조금씩 재산을 일구어 갔다. 고령의 시모는 식성이 까다롭고 며느리에 대한 구박이 심한 편이었지만 그녀는 한번도 시모를 거역한 일이 없었다. 봄철 보릿 고개인 춘궁기에도 그녀는 시모 밥상에는 언제나 쌀밥과 생선을 올렸으며 시모가 원하는 음식은 반드시 구해 봉양했다. 

 시모의 발병은 조금씩 불어가던 가산을 다시 원점으로 되돌리는 결과를 빚었다. 하루 종일 시모 곁에서 간호하고 명약을 찾아 전국을 헤매이기도 했다. 남편을 설득해 얼마 되지 않았던 화전까지 팔아 시모 병을 치료했지만 별 효험이 없자 이번에는 백일 기도를 시작했다. 모두 잠든 새벽녘에 몸을 말끔히 씻고는 부족한 효성을 사죄하면서 시모 완치를 빌었다. 백일기도로 시작한 기원은 3년간이나 계속됐다. 며느리의 감동 어린 효성에도 불구하고 시모의 병은 완치되지 않았으나 박씨의 효행은 널리 세상에 알려져 효행의 본보기로 추앙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