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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동 효부네집 - 김영희씨네집은 영양면민들의 큰 자랑거리이다.
15년 동안 병중의 시모를 알뜰히 모셔온 행적이 널리 알려져 그 동안 4차례의 표창을 받아서가 아니다.
김씨가 그 동안 실천한 효행이 마을 주민들에게까지 심어져 효행을 실천하는 주민들이 크게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손발을 전혀 쓰지 못하는 시모를 뒷바라지 하고 있는 그녀의 행동 하나 하나가 주민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는 것이다. 부모를 학대하던 패륜아까지도 마음을 고쳐 먹고 새로운 사람으로 바뀌어진 예는 이 마을에만 3건이나 된다.
지난 3월 23일 김씨가 네 번째의 효부표창을 받았을 때 마을 주민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큰 잔치를 베풀었었다. 이번의 표창은 마을 주민들에게 효 실천 운동을 일으키게 한 계기가 됐다.
'자기부모를 제대로 모시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위할 수 있겠느냐'는 소박한 논리에 따라 이웃돕기 운동에 앞서 가정에서 '효의 실천운동'부터 벌이기도 한 것이다. 이 같은 '효 실천 운동'의 전파자는 물론 김 씨였다.
김씨는 21세 때 방덕 성씨와 결혼했다.
전마선이 두 척이나 있던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그녀가 빈농의 농부에게 시집을 온 것은 이유가 있었다.
남편 방씨는 가난한 농부이기는 했지만 낙향한 선비의 후손으로 성실하고 근면한 청년이어서 당시 마을에서는 장래를 기대할 수 있는 청년으로 알려져 있었다. 신혼의 단꿈에 대한 기대는 결혼예식이 끝나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깨어져 버렸다.
시모 정차수씨가 전신불수의 중환자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던 것이다.
그녀의 시집살이는 불구 시모를 돌보는 일부터 시작됐다. 고생을 모르고 자란 김씨에게 시모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불결한 빨래를 도와야 하는 부담은 견디기 힘든 시련이었다. 시모와 남편은 김씨를 격려하고 위로했지만 시모를 편하게 모시기까지는 3년의 긴 세월이 필요했다. 시모는 김씨가 시집오기 17년 전 관절염 치료를 위해 침을 맞은 것이 잘못 되어 전신불수의 불구자가 됐다. 17년간 치료를 해오는 동안 부농의 재산은 모두 탕진해 빈농으로 전락했으며 가정은 장남의 집념으로 파탄을 겨우 모면하고 있었다. 김씨에게 지워진 짐은 이같이 위기에 처한 가정을 극복해 나가는 일이었다.
힘든 시모 시중을 견디어 내면서 생활에 자신을 얻은 김씨는 이 가정을 구해내는 길은 중병의 시모를 완치시키는 것뿐이라는 결론을 터득하게 되었다. 시모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끼니도 어려운 가난한 살림에 엄청난 치료비를 마련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쉬운 일부터 시작했다. 한약방을 찾아 다니며 시모 병에 대한 처방을 배웠다. 산에서 구할 수 있는 약초는 손수 산속을 헤매어 캐왔으며 구하기 힘든 약초는 구걸을 해서라도 얻어 왔다. 한약방 주인들은 눈물로 호소하는 김씨의 간청에 감동해 값비싼 약재까지 선뜻 내주기도 했다. 전신불수의 병이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한약덕분인지 시모는 얼굴에 핏기가 다시 돌고 잔병이 없어진 듯 했다.
약 구걸에만 매달릴 수 없어 그녀는 약값 마련을 위한 노동을 시작했다. 낮에는 남의 밭일을 돕고 밤에는 새끼를 꼬아 품삯을 모았다. 한달 동안 모은 돈으로 한약방을 찾아 다니며 가진 돈의 범위 안에서 좋다는 약은 모두 써보았다. 시집올 때 가져온 옷가지와 그릇을 팔기로 했다. 누군가 백 가지 약초를 모아 달여 마시면 쾌차한다기에 한달 동안 험준한 산을 뒤져 수 백 가지 풀을 뜯어서 한약방 주인의 감정을 거쳐 백 가지 약초를 골라 달여드렸지만 역시 헛수고였다.
어느 해 겨울에는 70리 떨어진 마을에 효험 있는 약초가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눈이 쏟아지는 산속 길을 헤매다 길을 잃고 얼어 죽을뻔한 일도 있었다. 김씨의 정성으로 대화마저 제대로 나눌 수 없던 시모는 74세의 고령에도 수족을 쓰지 못할 뿐 장수를 누리고 있다.
김씨의 정성은 올해 16년째 계속되고 있지만 시모를 위하는 정성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있다. 그녀는 시모의 병을 완치시키겠다는 결심이 오랜 세월을 보내서도 실현되지 못한 것은 자기 부족 때문이라고 자책하면서 시모가 편하게 여생을 즐길 수 있도록 효를 실천하고 있다. 가난한 살림이라 구미에 맞는 음식도 못해 드리고 좋은 옷을 해 드리지 못한 게 항상 마음에 걸리곤 했지만 그대신 시모가 가급적 편안한 마음으로 여생을 보낼 수 있게 해 주려고 온갖 정성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3남 1녀는 둔 김씨는 '성치 못한 시어머니께서 한해 한 해를 더 오래 사시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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