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김성구(金成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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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회(1972년 4월 17일)
보화상(補化賞) 본상(本賞)
상주군 모서면
효자(孝子) 김성구(金成九) 43세

3년 전이었다. 

마을 주민들은 반상회를 열어 새마을 사업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사업비 조달이 큰 문제였다. 마을공동기금이라고는 없었던 정산리 주민들은 마을 공동 명의로 된 마을앞산 20년생 소나무를 벌채 해 자금을 조달하자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이 소나무들은 솔잎 혹파리의 피해를 입어 고사직전에 있었다. 그러나 김씨만은 소나무 벌채를 적극 만류했다. 뚜렷한 이유 없이 그는 벌채만은 할 수 없다고 눈물을 머금고 애걸했다. 주민들 대다수의 찬성으로 김씨의 호소는 묵살된 채 벌채 허가가 면과 군청에 제출됐다. 다음 날부터 그는 면과 군청을 찾아 다니며 벌채 허가를 내주지 말라고 호소했다. 

주민들은 마을을 위한 사업에 언제나 가장 먼저 솔선해 참여해왔던 그가 이 같은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해 의아심을 품기 시작했다. 

어느 날 술자리를 마련 그를 불러들여 벌채를 반대하는 이유를 깨물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병든 노모 때문이라고 진실을 털어놨다. 벌채 예정지 앞에는 김씨의 농토가 있었다. 그는 추운 겨울을 제외하고는 이 숲 속에 노모를 모셔 놓고 농사일을 돌보아왔다. 

18년 동안 병든 노모가 이 숲 속에서 지나는 동안 숲이 정이 들어 여가가 생기면 이 숲 속으로 데려가 달라고 조른다는 것이다. 이 같이 노모가 아끼는 숲을 없앤다면 평생 씻지 못할 불효를 짓게 된다고 눈물을 짓는 것이었다. 

마을 주민들은 김씨의 효심에 감동하여 벌채 허가를 취소하고 이 숲을 '효자의 숲'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이야기는 김씨의 효행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강물과 웅덩이가 50cm이상 두텁게 얼어붙은 한 겨울철이라도 김씨 집 앞 개울에는 항상 얼음 구멍이 뚫려 있다. 노모가 배설한 오물을 씻어내기 위한 얼음 구멍이다. 그는 노모의 오물을 부락민이 모두 잠든 한밤 중에 반드시 자기 손으로 씻어냈다. 처와 자녀들이 만류했으나 뒤늦게라도 자식 된 도리를 다하게 해달라며 설득했다. 

김씨는 3세 때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랐다. 형이 있었으나 그는 가난한 농촌 생활에 싫증을 느끼고 형수와 조카를 남겨 둔 채 단신으로 일본에 건너간 후 30년 동안이나 소식을 끊고 있다. 

그는 국민학교를 겨우 졸업한 후 영농을 배우기 시작해 다섯 마지기의 적은 농토를 경작하면서 힘겹게 가정을 이끌어 왔다. 형수와 조카까지 떠맡아 가난하긴 했지만 화목한 가정을 유지해왔다. 

마을 일에는 언제나 앞장을 서 7년 동안이나 반장 일을 맡아 보기도 했다. 

모친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것은 그의 나이 25세 때인 1954년 8월이었다. 일찍 남편을 잃고 가난과 싸워 온 모친은 6.25를 겪는 동안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 체력을 유지 못하고 쓰러졌던 것이다. 아들이 성장 해 그 동안 겪은 고생이 보람을 느끼기 시작할 무렵에 불행이 덮친 것이다. 

처음부터 중증의 증세를 보여 쓰러진 채 손발을 움직이지 못하는 불구자가 되었다. 얼마 안 되는 전답 일부를 팔아 치료를 했으나 병원에서는 회복될 수 없는 중증이라고 두 손을 들었다. 그는 한약치료에 전념해 보기도 했다. 모친은 치료되지 않는 병을 위해 재산을 탕진하지 말라고 아들을 꾸짖었으나 10년 동안이나 치료를 중단하지 않고 계속했다.

모친의 시중은 반드시 그가 들었다. 대소변을 받아내는 일에서부터 식사를 떠먹이는 일, 오물 빨래까지 그 자신이 18년 동안 하루같이 계속했다. '효자의 숲'도 일하면서 병든 노모를 돌볼 수 있게 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었다. 한 여름철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 그는 모친을 업고 경작지 앞 시원한 숲 속에 모셔 놓고 돌보면서 일을 했다. 일하다가 소변이 보고 싶다고 소리 치면 달려가 거들어 주었다. 

남의 집 품앗이라도 가는 날이면 그는 안절부절 하면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마을 주민들은 그의 효심을 이해하고 일을 맡길 때는 하루 4차례씩 집에 다녀 올 수 있도록 허락하고 있다. 

모친이 대소변을 볼 시간에 맞추어 집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모친이 중병환자이면서도 18년간이나 살아있는 것은 효자의 지성을 다한 봉양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경작지가 얼마 되지 않아 춘궁기에는 끼니를 거르는 일이 많았지만 노모의 밥상은 언제나 산해진미로 가득 차 있다. 그의 효행은 부인의 정성 어린 내조 없이는 이루어질 수가 없었을 것이다. 

지난 해 2월 28일에는 마을 주민들이 모여 그를 마을 이름으로 효자 표창하고 관의 이름으로도 표창해달라고 군수에게 청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