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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를 가리켜 누가 온정이라고 했던가.
-'동온이하청혼정이신성(冬溫而夏淸昏定而晨省 )' - 겨울에는 따뜻하게 여름에는 시원하게 어버이를 모시여 저녁에는 잠자리를 펴드리고 아침에는 문안을 여쭙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면서도 또한 매우 어려운 일이다.
국민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그였지만 이 같은 '온청정신(溫淸定晨)'에 따른 효를 하면서 부모의 질병에 모든 정성을 다하고 부모의 뜻을 거역하지 않으며 마음을 다 바쳐 부모를 잘 공양해 왔다. 축산면 소재지에서 서북쪽으로 16km 떨어진 외딴 산간벽촌 오항동 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부모에 대한 효행이 남달리 뛰어났다.
가난했기에 상급학교 진학을 못한 시골 소년은 곧장 농부가 될 농촌의 갖가지 일을 배웠다. 착한 마음씨를 가진 그는 동구 밖에서 동네 친구들이 어울려 놀때 비록 남의 농사지만 구슬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만 했을 뿐이다.
땀 흘린 대가를 받을 때면 시골 장에 가서 부모의 신발이나 생선을 사오곤 해 부모는 물론 동민들까지 이 소년의 착한 행동에 놀라워 하기도 했다.
그가 17세 되던 해 부친은 원인 모를 병으로 몸져 앓아 눕게 되었다.
고열에 팔다리 마비 증세를 일으킨 부친의 병환에 모친과 그는 며칠째 꼬박 밤을 새우며 지극한 정성으로 간호를 했다. 가난했기 때문에 의원도 부를 수 없는 딱한 처지에 놓인 소년은 지게를 지고 뒷산에 올라가 단숨에 한 짐의 나무를 했다.
16km나 떨어진 면소재지까지 나무를 지고 간 그는 나무를 팔아 번 돈으로 약방을 찾아 부친의 증세를 얘기하고 약을 지었다. 한시라도 빨리 집에 돌아가기 위해 그는 한밤중의 고르지 못한 시골길을 부친의 약을 지었다는 기쁨에 피곤한 줄도 모르고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뛰었다.
아버지께 약을 잡숫게 하고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은 채 밤을 뜬눈으로 새우며 정성을 다해 간호했다.
해발 2백 70m나 되는 산을 수없이 오르내리며 나무를 해 팔고 약을 지어 부친의 병환을 간호한지도 6개월이 흘렀지만 회복은 기대할 수 없었다. 중환으로 신음하는 부친을 대할 때마다 그의 가슴은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느끼곤 했다.
그의 눈물 어린 정성에도 부친의 병환은 화장실도 가지 못할 정도로 악화 되어 손과 다리를 아예 쓰지 못하게 되었다. 부친의 곁에서 밥과 죽을 떠먹여 드리고 대소변을 일일이 받아내는 그는 부친의 완쾌만을 간절히 바라면서 온갖 시중을 성의를 다해 들었다.
그의 부친에 대한 정성은 실로 놀라왔다. 더운 여름에는 하루에도 여러 차례 깊은 샘물을 길러 물 적신 수건으로 땀을 닦아 드리고 추운 겨울에는 방을 따뜻이 하기 위해 밤낮으로 군불을 지피는 것을 몇 년 동안이나 잊지 않았다.
여름이면 또 평소 즐겨 드시는 과일을 겨울에는 별미 음식을 만들어 부친을 봉양하던 그는 23세가 되자 큰 걱정에 싸여 괴로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67세의 병든 부친과 65세의 모친을 모시고 그에게 군 입영장이 발부된 것이다. 그는 뜬 눈으로 밤을 새우며 곰곰이 생각한 끝에 결혼을 하기로 결심했다.
부모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다는 그의 평소 효행에 많은 찬사를 보내고 있던 동민들의 도움과 중매로 입영 1개월 전 황씨를 처로 맞아 간소한 예식을 올렸다.
부모를 위해 결혼을 했지만 당장의 생계가 막연했던 그는 입영 전 1개월 동안 온갖 일을 다해 다소간 지낼 수 있는 식량을 준비해 두고 입영을 기다렸다.
입영 몇 일 전 포항에 나간 그는 혈액원에 들러 자기의 피를 뽑아 팔았다. 그 돈으로 부친의 약과 식량을 사서 자기 처에게 맡기고 병중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잘 모실 것을 당부한 뒤 국민의 의무를 위해 입영했다.
북받쳐 오르는 오열을 참으면서 부모께 작별의 인사를 드리고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몸 건강히 계실 것을 되뇌이며 입영했던 그는 발걸음이 몹시도 무거웠다.
효성이 지극한 남편을 맞은 황 여인 역시 시부모 공양에 대단한 정성을 쏟았다. 남편의 참 뜻을 받들어 이웃에서 품 일을 산과 들에서는 나물을 깨 시부의 약과 양식을 팔아 시부를 극진히 간호하고 시모를 정성껏 모셨다. 그 남편의 그 처의 효행이 이처럼 눈물겹도록 계속 되자 이에 감동한 동민들은 성의를 다해 모은 돈과 쌀을 황 부인에게 전달하고 더욱 힘차게 살아갈 것을 위로하기도 했다.
군 복무중의 남편은 잦은 안부 편지를 띄우면서 적은 사병의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매월 집으로 송금해 왔으며 충실한 군복무로 부대장으로부터 모범 사병 표창을 받았다.
부모에게 하던 효행을 근본으로 국가에 충성을 다 바친 그는 3년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꿈에도 그리던 부모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 동안 처의 장한 행동을 위로하고 두 사람이 더욱 힘을 합해 부모를 잘 모실 것을 맹세했다.
그러나 제대한 지 3년째 되는 해 이들 부부의 정성스런 효행을 멀리한 채 병들어 신음하던 부친은 끝내 유명을 달리했다. 자리에 누운 지 12년 만에 타계한 것이다.
그의 나이 29세에 부친을 여의게 되자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고 3년상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부친의 묘소를 참배했다. 부친을 생각하는 정성으로 매일 새벽 5시만 되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꼭 묘소를 참배했다. 부친이 돌아가신 지 3개월째 우연히 모친이 실명이 되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데에는 소의 간이 좋다는 말을 전해 듣고 이를 구해 모친께 잡숫게 하고 갖은 정성과 간호로서 늙은 노모를 위로하여 회복될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
부부의 알뜰한 합심으로 논 5백평까지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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