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유문열(劉文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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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1959년 3월 11일)
보화상(補化賞) 본상(本賞)
달성군(達城郡) 하빈면(河濱面) 무등동(武等洞) 1324
효자(孝子) 유문열(劉文烈) 64세

조선시대 김자강(金自强)의 부모(父母)에 대한 효성(孝誠)은 널리 알려져 있다. 자강(自强)은 부친(父親) 서거(逝去) 후 모친(母親)을 효성(孝誠)으로 모셨다. 얼마 후 모친마저 돌아가시자 부친과 합장(合葬)하고 묘소 앞에 묘막(墓幕)을 지어 기거(寄居)하기 시작했다. 6년 동안이나 묘막에 귀거하면서 부모(父母)의 정을 떨쳐버리지 못하자 어느 날 처가(妻家) 식구들이 자강(自强)이 밭일 나간 사이에 묘막에 불을 질렸다. 부인을 돌보지 않는 자강(自强)을 집으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 최후 수단을 썼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3일간 식음(食飮)을 전폐하고 애통해 해서, 할 수 없이 다시 묘막을 지어 주었다. 자강(自强)은 다시 3년간을 묘막에서 지냈다.

당시에 그는 “부모(父母) 생존 시 효(孝)를 다하더니 부모(父母) 사망 후에도 사모함이 지극한 천출(天出)의 효자(孝子)”라는 칭찬을 받았으며 그의 효도(孝道)는 후세까지 알려지고 있다. 이 이야기는 현대사회에서는 이해될 수 없는 효도(孝道)이다. 그의 부모(父母)에 대한 애정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모두에게 공감을 주게 된다.

유(劉)씨가 실천한 효도(孝道)도 자강(自强)에 못지 않게 부모(父母)에게 공경을 다하고 지성(至誠)으로 사모한 효성(孝誠)이었다.

달성(達城) 군민(郡民)들은 유(劉)씨의 효행(孝行)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10년 전 그가 모친(母親)을 잃고 애통해 한 절규는 온 군민들을 감동케 했던 것이다. 그의 나이 53세 때 지성으로 받들어 왔던 모친(母親)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유(劉)씨는 모친(母親)이 별세(別世)한 것은 자기의 효성(孝誠)이 부족한 탓이라며 애통해 하더니 선산(先山)인 백령산(白靈山)에 모친(母親)을 안장(安葬)한 후 하루 서너 차례 묘소를 찾았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모친(母親) 묘소를 찾아 애통해 하던 그는 어느 날 묘소에서 밤을 꼬박 새우고 돌아온 후 묘소 앞에 초막(草幕)을 짓기 시작했다.

부인이 그의 행동을 만류했으나 유(劉)씨는 세속에 너무 가까이 있어 모친(母親)의 은공(恩功)을 잊기 쉽다면서 모친(母親) 생전에 못 다한 효도(孝道)를 사후라도 다 하기 위해 초막 생활을 하겠다고 버티었다.

그는 하루 종일 초막(草幕)을 지은 후 다음날부터 초막에서 기거하기 시작했다. 아침 저녁으로 묘소에 분향(焚香)을 올리고 묘소 주변을 언제나 단정하게 가꾸었다. 그는 낮에만 영농지에 나가 농사일을 거들었을 뿐 대부분의 시간을 이 초막에서 보냈다. 부인과 친척들은 그의 애통함을 만류하지 못해 3개월 동안 그의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그러나 그의 초막 생활은 해가 바뀌어도 계속돼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라고까지 몰아붙이곤 했다.

마을 사람들은 흰 상복(喪服)을 단정하게 입은 유(劉)씨가 새벽 5시에 묘소에 분향하고 있는 장면을 언제나 볼 수 있었다. 유(劉)씨의 초막 생활이 2년을 넘기자 그의 효심(孝心)은 달성(達城) 군민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본심(本心)에 감동한 유가(儒家) 자제(子弟)들이 찾아와 정중한 경애의 말을 남기기도 했다. 예기(禮記)에는 문왕(文王)의 효성(孝誠)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문왕(文王)이 어버이를 제사함에 있어 죽은 분을 섬기는 것이 마치 산 분을 섬기는 것과 같아서 죽는 이를 사모함이 마치 자기가 살기를 원치 않는 것과 같았다(文王之祭他事死者如事生 思死者如下欲生).”

3년 동안 계속된 그의 초막 생활은 문왕(文王)의 효심(孝心)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당시 군민들 사이에서는 유(劉)씨의 이 같은 모친(母親)을 사모하는 정(情)의 표현이 현대사회에서 옳은 효심(孝心)인가라는 문제로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우리가 그를 존경하게 되는 것은 그가 부모(父母)에 대한 양지(養志)를 철저하게 실천한 때문이다.

유(劉)씨는 유교(儒敎) 사상(思想)에 철저하게 집착하고 있는 낙향(落鄕) 선비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재동(才童)으로 부친(父親)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자란 그는 7세 때 한문학(漢文學)에 입문(入門), 10세 전에 공맹지서(孔孟之書)를 모두 수학(修學)했을 만큼 철저하게 유학(儒學)을 배웠다. 부친(父親) 사망으로 그는 신학문 수학을 포기하고 중농(中農)의 영농 일을 돌보기로 했다.

경작을 업으로 하는 농민의 효도(孝道)는 땅의 힘을 이용하고 연구하여 재배양식을 도모하는 일이다. 이렇게 하여 해마다 재산이 늘게 되면 어버이를 안주(安住)시킬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즉 부모의 부양을 완전히 하고 어버이 뜻을 즐겁게 하여 비로소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효도(孝道)를 다할 수 있는 것이다.

유(劉)씨가 실천한 효(孝)는 바로 이와 같은 평범한 농부(農夫)의 효도(孝道)를 다한 것이다. 해마다 줄어들고 있는 농토는 유(劉)씨가 성실하게 영농에 열중하자 조금씩 불어나기 시작, 40대 이후에는 부농(富農)으로까지 성장할 수 있었다. 그의 효심(孝心)은 일상생활에서 부모(父母)를 대하는 겸손한 태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아침 저녁으로 반드시 문안을 드렸으며 외출할 때에는 반드시 부모의 허락을 받고, 외출에서 돌아올 때에도 반드시 보고를 올렸다. 그리고 항상 자기의 몸가짐을 삼가 방종에 흐르지 않게 하고 사치를 경계했으며, 자식들에게도 웃어른에 대한 공경하는 마음을 철저하게 주입시켰다.

언제나 화목한 가정을 이끌어 온 그의 효도(孝道)는 양체(養體)와 양지(養志)를 다한 것이었다.

7년 전 달성군(達城郡) 하빈면장(河濱面長)의 효자(孝子) 표창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