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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길씨(朴明吉氏)는 1976년(年) 7월(月) 통장(統長)에 임명(任命)된 후부터, 누구보다 앞장서서 새마을 가꾸기에 솔선수범(率先垂範)해온 바 있는데, 그는 우선 자비(自費)를 들여 뒷골목 3개소(個所)에 가로등(街路燈)을 설치(設置)하여 밝은 마을을 조성(造成)하였다.
낮에는 전공생활(電工生活)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만,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후(後)부터는 거의 모든 시간(時間)을 마을을 위해 헌신노력(獻身努力)하는 애향심(愛鄕心)이 남달리 두터운 모범통장(模範統長)이었다.
그는 마을을 위해 제일 먼저 주민생활(住民生活)의 안녕(安寧)을 위해 15명(名)의 민방위대원(民防衛隊圓)을 야간(夜間) 순찰조(巡察組)로 편입(編入)시켜, 매일(每日) 밤 동내(洞內)를 순찰(巡察)하면서 청소년선도(靑少年善導)와 사회정화(社會淨化)를 위해 힘쓰는 한편, 새마을 가꾸기 사업(事業)에 앞장서 왔다.
그러던 중 1977년(年) 11월(月) 3일(日), 야간순찰(夜間巡察)을 하다가 불양배(不良輩)로부터 급습(急襲)을 당해 안면(顔面)에 2주(週) 정도(程度) 깊은 상처(傷處)를 입은 일도 있는데, 그는 오히려 불양배(不良輩)를 고발(告發)하기는 커녕 그의 부모(父母)를 찾아가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간곡한 선도(善導)로 그를 용허(容許)하는 따뜻한 인간애(人間愛)를 베풀기도 하였다.
세상(世上)을 깜짝 놀라게 했던 리이역(裡異驛) 폭발사고(爆發事故)때는, 어느 마을보다 앞서서 반상회(班常會)를 개최(開催)하여 3만(萬)원의 성금(誠金)을 모금(募金)하여 방송국(放送局)에 전달(傳達)하기도 했고, 또한 고성1가동(古城1街洞) 1통(統) 거주(居住)하는 김성곤씨(金成坤氏) 집에서 화재피해(火災被害)가 있었을 때도 반상회(班常會)를 개최하여 33,000원의 성금(誠金)을 거두어 전달(傳達)함과 아울러, 새로 터전을 잡을 때까지 약(約) 1개월간(個月間) 방세(房貰) 없이 거주(居住)할 수 있도록 임시거처(臨時居處)도 마련해서 새로운 삶의 의욕(意慾)을 복돋워 주는등, 통반(統班) 산하(傘下)의 주민(住民)들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열심(熱心)히 봉사(奉仕)해 왔다.
그 역시(亦是) 가난한 전공생활(電工生活)에 불과(不過)했지만 동리(洞里) 노인(老人)들을 자택(自宅)으로 초청(招請)하여 조철하긴 했지만 따뜻한 주연(酒宴)을 베풀어, 노인(老人)들을 위안격려(慰安激勵)한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충효(忠孝) 및 경노사상(敬老思想)에 남달리 관심(關心)이 두터운 그는, 때때로 동리(洞里)청소년(靑少年)들을 앞에서 곧잘 "봄이 있었기에 가을이 있고, 씨를 뿌렸기에 수확(收穫)이 있으며, 알찬 노력(努力)이 있었기에 풍요(豊饒)한 결실(結實)이 있을 수 있다."라고 말하면서, 웃어른들 공경(恭敬)하는 마음을 가을에 거두어들이는 수확(收穫)과 비유해, 우리를 낳아 주시고 키워 주시고 가르쳐 주신 웃어른들을 존경(尊敬)해야 한다고 설득(說得)하는 일을 되풀이하고 있다.
아닌게 아니라, 양친(兩親)을 모시고 있는 그의 효성(孝誠)은 대단하기만 했는데, 부모(父母)님께서 병상(病床)에 누워 계실 때는 뜬눈으로 밤을 꼬박 새우면서 간호(看護)를 하는가 하면, 수시(隨時)로 맛있는 음식(飮食)을 사다가 대접(待接)해 드리는 등 그의 효심(孝心)은 갸륵하기만 하였다.
날마다 새벽이면 제일 먼저 일어나 비를 들고 온 마을 청소(淸掃)를 도맡아 하는 그는, 대구시내(大邱市內)에서도 모범통장(模範統長)으로 알려진 숨은 봉사자(奉仕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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