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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옥연(房玉蓮) 여사(女史)의 부군(夫君) 전직(前職) 경찰관(警察官)이었으나, 노모(老母)와 슬하(膝下)에 어린 3남(男) 3녀(女)를 남겨놓고 불행(不幸)하게도 지병(持病)인 위암(胃癌)으로 퇴직(退職)3년(年)만에 타계(他界)하였다.
이로 인(因)한 많은 치료비(治療費)로 가산(家産)까지 탕진(蕩盡)하게 되었고, 종국에는 시모(媤母)와 어린 자식(子息)들을 거느리고 남의 집 셋방살이로 전전(轉轉)하게 되었다.
생계(生計)를 위한 품삯 등 막 노동(勞動)으로 연명(延命)해 왔으나 그나마 겨울철에는 품삯 일터마저 찾을 길이 없어, 하는 수 없이 하루 150여리(餘里)를 도보(徒步)로 헤매는 고된 행상(行商)길에 나서야만 했다.
5일장(日場)이 서는 장터를 찾아서 상품(商品)을 매입(買入)한 다음, 다시 그 물건을 팔기 위해 두메산골을 누비면서 행상(行商)을 시작한 지도 어언(於焉) 3년(年)이 흘러갔다.
그런데, 행상(行商)을 하느라 동분서주(東奔西走)하다 보니, 자식(子息)들과의 애정(愛情)이 멀어지는 등 여러 가지 폐단(弊端)이 많아, 행상(行商)을 집어치우고 남의 집 식모(食母)로 취업(就業)하게 되었다.
새벽 5시(時)부터 밤 12시(時)까지의 하루 일을 마친 다음, 10여리(餘里) 길을 걸어서 집에 돌아오는 일이란 그야말로 뼈를 깎는 고통(苦痛)있었지마는, 방여사(房女史)는 10년(年)을 하루같이 그 길을 행복(幸福)을 안겨주는 고난(苦難)의 길로 여기면서 꿋꿋하게 참고 살아갔다.
그런 고(苦)된 생활(生活)을 해 오던 중, 집안의 기둥이었던 시모(媤母)님마저 세상(世上)을 떠나시니, 당장 가정(家庭)을 보살펴 줄 사람이 없게 되어 또 하나의 걱정이 겹치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多幸)하게도 자식(子息)들 스스로가 밥을 지어 먹고 등교(登校)하는 바람에 한 시름 놓을 수는 있었지만, 도시락도 없이 굶주린 창자를 움켜쥐고 공부(工夫)를 하고 있으려니 하는 애처로운 마음이 들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팠다는 방여사(房女史), 그러나 그의 가난(刻難)의 노력(努力)의 보람은 헛되지 않아 자녀(子女)들이 우등상장(優等賞狀)을 안겨 주기도 했고, 그보다도 식모(食母)살이 10년(年) 고생(苦生) 끝에 오두막집이나마 내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는 기쁨, 그리고 두 딸을 어엿하게 키워서 시집을 보냈는가 하면, 맏아들은 초급대학(初級大學)을 졸업(卒業)시켰는데 현재(現在) 공직(公職)에 몸을 담고 있으며 맏며느리까지 맞이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차남(次男)은 아버지가 못다하신 것을 이루어 보겠다는 신념(信念)으로 경찰계(警察界)에 투신(投身)하였고, 셋째는 충성(忠誠)을 외치며 전문(專門)으로, 또한 막내딸은 울산공단(蔚山工團)에서 산업투군(産業投軍)으로, 이렇듯 자녀(子女)들이 저마다의 길을 찾아서 근면성실(勤勉誠實)하게 희망(希望)에 부푼 꿈을 키워 나가고 있다.
일찌기 남편(男便)을 여윈 방여사(房女史)는, 연약(軟弱)한 여성(女性)의 몸으로 위로는 시모(媤母)님을 극진(極盡)히 모시면서, 아래로는 6남매(男妹)를 모신 고난(苦難)과 싸워 나가면서 훌륭하게 키워 온 방여사(房女史)야 말로, 역경(逆境)에 처(處)한 모든 여성(女性)들이 본받아야 할 거룩한 부여상(婦女像)이 아닐까.
방여사(房女史)의 가정(家庭)에는 비록 남들처럼 거창한 가훈(家訓)같은 것은 없었지만, 그는 언제나 자녀(子女)들에게 입버릇처럼 "봄에 꽃이 없으면 가을에 열매가 없다."는 말로 근면(勤勉)과 성실(誠實)의 참된 의의(意義)를 되세겨 주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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