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이상금(李尙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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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1978년 4월 27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청도군 이서면
열부(烈婦) 이상금(李尙今) 66세

양자(養子)한테 출가(出嫁)한 이상금(李尙今) 여사(女史)는 병(病)든, 양시부모(養媤父母)님을 모시고 어려운 살림을 떠맡아야 할 만큼 결혼초기(結婚初期)부터 불행(不幸)의 길에 들어선 그런 여인(女人)이었다.

그가 꾸려가야 할 가정(家庭)이 생활보호대상자(生活保護對象者)라는 것 하나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신혼초(新婚初)부터 이틀이 멀다 하고 밥을 굶는 일이 많았고, 겨우 죽이나 국수 등으로 그날 그날의 생활(生活)을 간신히 이어가는 궁핍(窮乏)한 가정(家庭)이었다. 

거기다 병상(病床)에 누워 계시는 시부모(媤父母)님의 뒷바라지도 일이었는데,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남편(男便)까지 몸져 눕게 되니 불과(不過) 4명(名) 식구(食口)에 3명(名)이 병상(病床)의 몸이 된 기막힌 현실(現實)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러나 이여사(李女史)는 이를 악물고 행상(行商)길에 나서서 거기서 얻어진 돈으로 남편(男便)의 약(藥)과 시부모(媤父母)님을 약(藥)을 지어다 드리기도 하였고, 먹고 싶다는 음식물(飮食物)도 마련하여 병자(病者)들이 조금도 섭섭한 마음이 들지 않도록 온갖 정성(精誠)을 다 기울여 보살펴 드렸다. 

그러나 그의 지극(至極)한 구환(救患)의 보람도 없이 남편(男便)은 그만 불귀(不歸)의 몸이 되고 말았다. 

남편(男便)을 여윈 이여사(李女史)는, 남편(男便)에게 못다한 정성(精誠)을 시부모(媤父母)님께 바치기로 결심(決心)하고, 더욱 알뜰한 보살핌으로 최선(最善)을 다하여 봉양(奉養)하였다.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계(契)바람을 탄 관광(觀光)나들이도 일절(一切) 외면(外面)한 채, 오로지 시부모(媤父母)님 공양(恭養)하는 데만 힘써 온 그는, 누가 보나 고개가 저절로 수그러지는 열부(烈婦)였다. 

친시부모(親媤父母)님도 아닌 양시부모(養媤父母)님을 극진히 모시고 있는 그의 아름다운 효행(孝行)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어느 해 추운 겨울에는, 마침 땔감이 떨어져 하는 수 없이 밤중에 산으로 올라가 땔감을 구(求)해다가 방(房)바닥을 뜨스하게 해 드리기도 했고, 또는 땔감이 떨어져 하는 수 없이 얼음장만 같은 온돌방(溫突房)에서 지내야 했을 때는, 자신(自身)이 덮고 자야 할 이부자리를 시부모(媤父母)님에게 덮어 드리고 자신(自身)은 밤새 오돌오돌 떨면서 뜬눈으로 밤을 세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에게도 남편(男便)이 남긴 딸이 셋이 있었지만, 맛있는 음식(飮食)은 시부모(媤父母)님께 먼저 드리고 딸들은 모두 밖으로 내쫒아 버릴 만큼 그가 베푼 갸륵한 효행(孝行)은 하늘도 땅도 감동(感動)할 정도(程度)였다. 

무학(無學)인 그는 딸들에게 곧잘 "정성(精誠)이 지극(至極)하면 돌 위에도 풀이 난다."는 속담(俗談)을 인용(引用)하면서 비록 가난하게 살지만 꿩 대신 닭을 쓰는 따위의 눈가림으로, 이 세상(世上)을 살아가면 안 된다고 정직성(正直性)도 아울러 가르치는 자랑스러운 어머니이기도 한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춘하추동(春夏秋冬)을 하루같이 행상(行商)으로 살림을 꾸려 온 이여사(李女史)는 딸 셋 모두를 출가(出嫁)시키고 지금은 혼자서 쓸쓸히 만년(晩年)을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