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김순옥(李尙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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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1978년 4월 27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영주군 영주면
효녀(孝女) 김순옥(李尙今) 20세

김순옥양(金順玉孃)의 아버지는 불구(不具)의 몸으로 목공기술(木工技術)을 지니고 있었지만, 익힌 기술(技術)이 견습공(見習工)의 경지(境地)를 벗어나지 못해 5인(人) 가족(家族)의 생계(生計)는 날이 갈수록 막막하기만 했다. 

부득이(不得已) 김양(金孃)의 식모(食母)살이 수입(收入)으로 겨우 연명(延命)을 해 오던 중, 1973년(年)에 이웃의 도움으로 영주전문학교(榮州專門學校)의 사환(使喚)으로 취업(就業)하게 되어 생활(生活)에 다소(多少)나마 보탬이 되었다. 

이와 같이 김양(金孃)의 힘으로 가까스로 연명(延命)을 해 나가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엎친 데 덮친 격(格)으로 77세(歲)된 종시부(從媤父)님과 84세(歲)의 외시모(外媤母)님께서 의탁(依託)할 곳이 없어, 김양(金孃)이 같이 모시지 않으면 안될 딱한 처지(處地)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김양(金孃)이나 그의 부모(父母)님들은 조금도 싫은 표정(表情)을 짓지 않았으며, 콩 한 알이라도 나누어 먹어야 한다는 가르침에 따라, 비록 가난은 했지만 비둘기 가족(家族)처럼 다정(多情)하게 살기도 했다. 

이로써 김양(金孃)은 식구(食口)는 모두 7명(名)의 대가족(大家族)으로 불어났고 생활(生活)은 더욱 어려운 고비로 접어들게 되었다. 

하루 하루의 끼니를 겨우 이어가는 딱한 처지(處地)이기는 했지만, 그런 환경(環境)속에서도 가정(家庭)을 자립(自立)시켜 보겠다는 김양(金孃)의 의지(意志)는 더욱 굳어져 있다.

한편 양친(兩親)과 종시부(從媤父)님, 그리고 외조모(外祖母)님에 대(對)한 그 여(女)의 공경심(恭敬心)도 대단했는데, 그 좋은 예(例)로 아침저녁으로 깎듯이 문안(問安)드리는 예의범절(禮儀凡節)을 잊지 않았고, 월급(月給)날이면 이 분들이 좋아하는 음식물(飮食物)을 사들고 와서 대접(待接)하기가 일쑤였으며, 특히 노인(老人)들이 병(病)들어 누워 계실 때는 꼬박 밤을 새워 정성(精誠)들여 간호(看護)해 드리는 일도 비일비재(非一非再)하였다. 

"날은 스스로 돕는 자(者)를 돕는다."고나 할까, 사환생활(使喚生活) 몇 년(年)만에 그의 성실성(誠實性)과 근면성(勤勉性)이 인정(認定)되어, 그가 근무(勤務)하는 영주전문학교(榮州專門學校) 세무부서(世務部署)인 경리사무직(經理事務職) 발령(發令)을 받게 되어, 어렵기만 했던 그의 가정(家庭)에도 새로운 생기(生氣)를 찾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두 동생도 중학교(中學校)와 고등학교(高等學校)에 진학(進學)시키는 등, 연약(軟弱)한 처녀(處女)의 힘은 위대(偉大)하고 장(壯)하기만 했다. 

무엇보다 놀라운 사실(事實)은, 그 자신(自身) 꾸준히 공부를 하여 동교(同校) 교간부(校間部) 경영학과(經營學科)에 입학(入學)해서, 낮에는 직장생활(職場生活)을 하고 밤에는 학교(學校)에 나가는 억척스런 근면성(勤勉性)을 보여 주었다. 

고난(苦難)속에서 독학(獨學)을 해서 방송통신(放送通信) 고등과정(高等科程)을 마치고 다시 그의 원대(遠大)한 소망(所望)이었던 대학(大學)의 문(門)도 두드리게 된 김양(金孃)은, 비단 그가 살고 있는 마을에서뿐만 아니라, 학교생활(學校生活)에서도 모범생(模範生)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데, 어느 비 오는 날, 밤늦게 하교(下校)하여 집으로 가는 길에 노망기(老妄氣)가 있는 길 잃은 노인(老人)을 발견하고, 그를 집에까지 모셔다 준 일이 있을 정도(程度)로, 웃어른들을 공경(恭敬)하고 그의 효심(孝心)과 선행(善行)은 갸륵하기만 하였다. 

마을에서나 학교(學校)에서나 "얌전이"란 별명(別名)으로 불리고 있는 효녀(孝女) 김양(金孃)은, 미래(未來)꿈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신사임당(申師任堂)과 같은 훌륭한 어머니가 되고 싶은 것이 그의 소망(所望)이라고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