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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옥양(朴英玉孃)은 학창시절(學窓時節)에 줄곧 장학생(奬學生)으로 또는 학생회장(學生會長)을 지낸 후(後), 서울 세브란스 병원제약실(病院製藥室)에서 희망(希望)찬 첫발을 내디뎠는데, 뜻밖에도 아버지의 병(病)이 악화(惡化)되어 간다는 급보(急報)에 접(接)하고 취업(就業)8개월(個月)만에 직장(職場)을 그만두고 그 길로 고향(故鄕)으로 내려가, 그 날부터 병간호(病看護)에 힘쓰는 한편 논밭으로 뛰어들어 처녀(處女) 농군(農軍)의 길을 밟았다.
그러나 불과(不過) 400여평(餘坪)의 논밭으로는 네 식구(食口)의 연명(延命)조차 어려운 실정(實情)이어서, 남의 집 농사(農事)일을 도우면서 거기에서 얻은 품삯으로 생활(生活)에 보탬이 되게 하는 한편, 속병에 좋다는 약(藥)을 손수 달여 드리기도 했다.
그래도 부족(不足)해서 깊은 산골짝을 헤매면서 산나물을 캐다가 내다 팔기도 했다.
그가 살고 있는 마을이라야 고작 15호(戶)안팎의 세대(世帶)뿐인데 그나마, 청년(靑年)들은 모두 도시(都市)로 나가 버리고, 마을에는 60세(歲) 이상(以上)된 노인(老人) 13명(名)을 비롯하여 부여자(婦女子)가 마을을 지키고 있는 복(福)받지 못한 마을이었다.
처녀(處女) 농군(農軍)의 기수(旗手)가 되고자 했던 박양(朴孃)의 의지(意志)는 더욱 굳어져, 통일(統一)벼로 다수확(多收穫)을 하는 농작(農作)의 꿈을 이루는 길부터 열어 놓았다.
옹고집 노인(老人)들이 많은 곳이어서 계몽(啓蒙)과 실천(實踐)에는 피나는 노력(努力)이 뒤따랐다.
"암탉이 울면 집안 망(亡)한다."는 비웃음 속에서도 결국(結局) 그는 해냈다.
반당(反當)에 불과(不過) 300~400kg밖에 수확(收穫)하지 못했던 것이 732kg 기적(奇蹟)을 낳아, 벼 다수확왕(多數穫王)의 영광(榮光)을 안게 되었고 금릉군수(金陵郡守)로부터 표창장(表彰狀)도 받았다.
또한 그 여(女)의 선도(善導)로 두메사골에도 수익성(收益性)이 높은 비닐하우스 재배(栽培)를 시작해서 보다 높은 소득증대(所得增大)의 길도 터 놓았다.
작은 농토(農土)에서 최대한(最大限)의 수익(收益)을 높여 보리라는 그의 꿈이 실현(實現)되면서부터, 해마다 농사(農事)철만 되면 묘판설치(苗板設置)에서부터 벼를 수확(收穫)할 때까지의 모든 작업(作業)은 박양(朴孃)이 시키는 대로 온 동민(洞民)들이 말없이 뒤 따라 주었다.
암탉이 울면 집안 망(亡)한다는 비웃음은 어느 새 암탉이 울면 집안 흥(興)한다는 말로 바뀌어질 만큼, 농촌지도자(農村指導者)로서의 박양(朴孃)의 위치(位置)는 하루가 다르게 굳어져만 갔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고나 할까, 그의 정성(精誠)어린 구환(救患)으로 아버지의 병세(病勢)도 차츰 호전(好轉)되어 갔고, 그의 끈덕진 노력(努力)으로 생활(生活)에도 다소(多少) 윤기(潤氣)를 되찾게 되었다.
한편으로 새마을 사업(事業)에 대한 의욕(意慾)도 대단했는데, 그는 마을 사람들 앞에서 곧잘 이런 말을 하였다.
"스위스와 덴마크와 이스라엘을 보세요. 우리가 소비(消費)할 때 그들은 열심히 저축(貯蓄)했으며, 우리가 내일(來日)을 잊고 오늘만을 생각하고 있을 때, 그들은 내일(來日)을 위해 오늘을 굶주리면서 일했던 것입니다."라고 효녀(孝女) 박영옥양(朴英玉孃)은, 농촌(農村)의 참 지도자(指導者)답게 마을에서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열심히 땀 흘려 일하는 장(壯)한 처녀(處女) 농군(農軍)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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