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김상진(金尙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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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1978년 4월 27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상주군 함창면
효자(孝子) 김상진(金尙鎭) 48세

김상진씨(金尙鎭氏)는 6.25 동란(動亂) 때 군복무(軍服務) 중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비보(悲報)를 듣고, 얼마 후(後) 제대(除隊)하여 고향(故鄕)에 돌아왔지만 그를 반긴 것은 홀로 계신 어머니 뿐이었는데, 그의 모친(母親)은 중풍(中風)으로 병상(病桑)에 누워 계시는 몸이었다. 

어려운 환경(環境)속에서도 결혼(結婚)한 그년 쪼들리는 가난으로 더욱 고통(苦痛)스럽기만 했는데, 오죽했으면 중풍(中風)에 좋다는 약(藥)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한 첩의 한약(漢藥)도 써 볼 염두(念頭)도 못 냈을까. 

그 날부터 손쉬운 민간요법(民間療法)과 산과 들판을 헤매면서 중풍(中風)에 효험(效驗)이 있다는 이런저런 약초(藥草)를 캐어서 달여 드렸다. 

그리고 고기가 잡수시고 싶다고 하시면, 손수 냇가를 찾아가서 고기를 낚아다가 봉양(奉養)해 드렸지만, 중풍(中風)의 증세(症勢)는 더욱 깊어만 갈 뿐이었다. 

김씨(金氏)는 날이 갈수록 더욱 극심(極甚)한 생계(生計)의 위협(威脅)을 느끼자, 병(病)든 어머니를 모시고 강원도(江原道) 황지탄광(黃池炭鑛)으로 생활(生活)의 터전을 옮겨 간 후(後)에도, 고된 탄광노동(炭鑛勞動)의 피로(疲勞)도 아랑곳 않고 아내의 교대(交代)로 밤새껏 팔다리를 주물러 드렸는가 하면, 그들 부부(夫婦)를 비롯한 자녀(子女)들은 값싼 음식(飮食)으로 한끼 한끼를 메꿔 나가면서도, 어머님께 만은 맛있고 영양가(營養價)있는 음식(飮食)으로 대접(待接)하여 언제나 마음을 즐겁게 해 드렸다. 

모친(母親)의 와병중(臥病中)의 용변(用便)치닥거리도 두 내외(內外)가 번갈아 가면서 시중드렸는데, 이들의 지성(至誠)어린 구환(救患)은 자그마치 강산(江山)이 두 번이나 변(變)한다는 20년(年)이란 긴 세월(歲月)을 끌었다. 

오랜 간호생활(看護生活)에 지친 탓인지 이번에는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그의 아내가 심장병(心臟病) 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탄광촌(炭鑛村)에서 먹지 않고 입지 않고 저축(貯蓄)한 돈으로, 가까스로 고향(故鄕)에다 600여평(餘坪)의 논밭까지 마련할 수 있었는데, 아내가 어머니 함께 병상(病床)을 차지하는 바람에 그의 심적(心的) 괴로움은 더욱 커져만 같다. 

한편으로는 농사(農事)를 지으면서 어머니와 아내의 구환(救患)을 해야 하는 그에게, 이번에는 동생이 다른 광부(鑛夫)들과 함께 한꺼번에 탄광(炭鑛)에서 매몰(埋沒)되었다는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비보(悲報)에 접(接)하였다. 

정신착락(精神錯落)을 일으킬 정도로 그의 마음은 착잡(錯雜)했지만, 남은 식구(食口)만이라도 살려 보자는 신념(信念)으로, 일손 틈틈이 아내와 어머니를 위해 그야말로 눈물겨운 간호(看護)를 계속(繼續) 하였다. 

그러나 정성(精誠)어린 구환(救患)과 따뜻한 간호(看護)의 보람도 없이 그의 아내는 영원(永遠)히 불귀(不歸)의 몸이 되고 말았고, 어머니의 중풍(中風)은 단 한 치의 차도(差度)도 없이 20년전(年前)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상태(狀態)였다. 

아내를 잃은 비통(悲痛)함을 채 가다듬을 사이도 없이 어머니를 돌보는 그의 손길은 오늘도 따뜻하기만 했다. 

홀아비의 몸으로 세 자녀(子女)에다 어쩔 수 없이 떠맡게 된 두 질녀(姪女), 그리고 중풍(中風)인 모친(母親)을 돌봐야 하는 일만 들어도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팔자(八字)로 돌리고 가정(家庭)을 원통(圓通)하게 이끌어 나가고 있다. 

황지탄광(黃池炭鑛)에서 동무(動務)할 때 그의 효행(孝行)이 얼마나 갸륵했던지 황지노인회(黃池老人會)에서 효행상(孝行賞)을 그의 가슴에 안겨 주기도 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