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권랑란(權娘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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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1978년 4월 27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봉화군 봉화면
효부(孝婦) 권랑란(權娘蘭) 49세

권랑란(權娘蘭) 여사(女史)는, 1029년(年) 경북(慶北) 인동군(安東郡) 임하면(臨下面) 임하동(臨下洞)에 있는 조선(朝鮮) 인조(仁祖)때의 문신(文臣) 이우당권환(二憂堂權奐) 선생의 종택(宗宅)에서 종손(宗孫) 권녕진씨(權寧鎭氏)의 외딸로 태어났다.  

이우당(二憂堂) 선생(先生)은 한강(寒岡) 정적(鄭迹) 선생(先生)의 문인(門人)으로서 조선(朝鮮) 인조(仁祖) 17년(年) 무년문과(戊年文科)에 급제(及第)한 문신(文臣)이며 남인계(南人系)의 명망(名望) 높은 학자(學者)이다. 

권여사(權女史)는 명문(名門)의 후손(後孫)으로 태어나서 엄격(嚴格)한 가정교육(家庭敎育)을 받았으며 일찍 중학교(中學校)를 졸업하고 행복(幸福)하게 자라 20세(歲) 되던 해에, 안동군(安東郡) 도산면(陶山面) 온혜동(溫惠洞)에 사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先生)의 후예(後裔)로서 온혜파(溫惠派) 종손(宗孫)인 이재덕씨(李載德氏)와 결혼(結婚)하였다. 

누대(累代) 종가(宗家)의 종부(宗婦)로 시집은 권여사(權女史)는, 친적간(親戚間)에 화목(和睦)하고 시조모(媤祖母)님, 시부모(媤父母)님을 모시면서 단락(團樂)하게 살아오던 중 27세(歲) 때, 6.25 당시(當時) 도산면장(陶山面長)을 역임(歷任)하신 시부(媤父)님께서 갑자기 폐질환(肺疾患)으로 시달리게 되자, 백방(百方)으로 약(藥)을 구(求)하여 구료(救療)하였으나, 시부(媤父)께서는 자부(子婦) 권여사(權女史)의 극진한 간호(看護)의 보람도 없이 마침내 별세(別世)하셨다. 

임동시(臨冬時) 시부(媤父)님께서 권여사(權女史)의 손을 잡고, "너의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에 보답(報答)하지 못하고 죽는 것이 천추(千秋)의 한(恨)이로구나." 하시며 운명(殞命)하셨다. 

그 후(後) 조석상식(朝夕上食)을 올리면서 3년상(年喪)을 하루같이 모셨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권여사(權女史)가 36세(歲) 때, 하늘같이 믿고 공경(恭敬)하던 시모(媤母)님께서 중풍(中風)으로 심신(心身)이 불구(不具)가 되시자, 대소변(大小便) 받아내는 등 시모(媤母)님의 병고(病苦)를 자신(自身)의 아름으로 여기면서 다년간(多年間) 구료(救療)에 심혈(心血)을 기울였으나, 아무 보람도 없이 세상(世上)을 떠나셨다. 

시부모(媤父母)님을 다 여윈 슬픔에 잠겨 있을 겨를도 없었다. 

그것은 자식(子息) 내외(內外)를 먼저 저세상(世上)으로 보내고 상심(傷心)한 나머지 한쪽 눈이 실명(失明)되고, 중풍(中風)으로 기동(起動)이 어려우신 92세(歲)의 시조모(媤祖母)님 시봉(侍奉)에 여념(餘念)이 없었기 때문이다. 

현직(現職) 국민학교(國民學校) 교감(校監)인 부군(夫君)은 외지(外地)에서 근무(勤務)하는 터라 박봉(薄俸)을 쪼개어 조모(祖母)님께서 좋아하시는 음식(飮食) 좋다는 약(藥)을 구(求)하여 효부(孝婦) 권여사(權女史)에게 전(傳)하여 줄 뿐이고 시탕(侍湯)할 처지(處地)가 못 되니 조모(祖母)님의 구료(救療)에 전력(全力)을 다하면서 고향(故鄕)을 지켜주는 아내의 효행(孝行)에 다만 감동(感動)할 따름이었다. 

외지(外地)에 진학(進學)하고 있는 사랑하는 자녀(子女)에게나 남편(男便)의 전출지(轉出地)에 따라가서 평안(平安)히 살 수도 있으련만, 시양친(媤兩親)과 시조모(媤祖母)님을 모시는 일로 꽃 같은 청춘(靑春)을 다 바치고 52세(歲) 호적상(戶籍上 49세(歲)의 초노(初老)가 된 여사(女史)께서는 이마에 주름살과 흰 머리카락만 남게 되었으나, 지나간 청춘(靑春)을 조금도 후회(後悔)하지 아니하였다. 

오늘도 누대(累代) 봉사손(奉祀孫)의 종부(宗婦)로서 잦은 시제(時祭)를 경건히 받들 뿐 아니라, 92세(歲)의 고령(高齡)이신 시조모(媤祖母)님 봉양(奉養)에 성심(誠心)을 다하니, 그의 높은 부덕(婦德)은 경노효친(敬老孝親)의 모범(模範)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