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김원이(李元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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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1978년 4월 27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예천군 개포면
효부(孝婦) 김원이(李元伊) 49세

김원이(金元伊) 효부(孝婦)는 시부(媤父)가 병환(病患)으로 문(門)밖 출입(出入)을 못하는 집에 민며느리로 와서 물중걸식(門中乞食)을 하며 6세(歲)의 어릴 때부터 시부모(媤父母)님의 시중을 들면서 살아왔다. 

그런데, 시모(媤母)님의 병세악화(病勢惡化)로 15세(歲)때 결혼(結婚)했는데, 부군(夫君)은 일본인(日本人)이 경영(經營)하는 숯 공장(工場)에 다니며 돈을 벌고, 김여사(金女史)는 시모(媤母)님을 도와 길쌈과 공품(工品) 생산(生産) 등들 하다가 수입(收入)이 시원찮으므로, 묵과 청포, 떡 등을 만들어 팔아서 시부모(媤父母)님을 받들고 생계(生計)를 이어나갔다. 

부군(夫君)이 숯 공장(工場)에서 일하다 우연(偶然)히 병(病)을 얻었기에, 온갖 정성(精誠)으로 구환(救患)하였으나 4년 후(年後)에 끝내 별세(別世)하고 마니. 19세(歲)에 청상과부(靑孀寡婦)가 된 김여사(金女史)는, 살아갈 길이 더욱 막막(漠漠)하기만 하였던 것이다.

농가(農家)이었음에도 농토(農土)가 없기에 마을 뒤에 산전(山田) 600평(坪)을 개간(開墾)하여 2년(年)을 농사(農事)지었는데 이도 역시 산주(山主)에게 빼앗기니, 이 때부터 개간(開墾)은 단념(斷念)하고 이웃 농가(農家)의 삯일로 가계(家計)를 이어나갔다. 

6.25 사변(事變) 떄 화병중(臥病中)인 시부(媤父)님을 업고 산골 마을로 피난(避難)을 가서 간병(看病)에 열중(熱中)하던 중, 주위(周圍)사람들의 이야기로 사림의 뼈 인골(人骨)가 시부모(媤父母)님의 병(病)에 좋은 약(藥)이 된다는 말을 믿고, 전쟁(戰爭)이 휩쓸고 간 문경군(聞慶郡) 어느 산골짜기에서 구(求)하여 약(藥)을 만들어 드렸더니, 신기(神奇)하게도 완쾌(完快)되었고 그 후(後) 83세(歲)를 형수(亨壽)하였다. 

그 후(後) 시모(媤母)님께서 우연(偶然)히 안질(眼疾)을 얻었는데 결국(決局) 실명(失明)하게 되었다. 

좋다는 약(藥)을 다 써보았으나 백약(百藥)이 무효(無效)라서 한밤중에 백일기도(百日祈禱)를 올려 보기도 하면서 정성(精誠)을 다한 결과(結果), 천지신령(天地神靈)이 감응(感應)하였음인지 3개월 후(個月 後)부터 차츰 차도(差度)가 있더니 오래지 않아 회복(恢復)되어 광명(光明)을 되찾고 완쾌(完快)되었다. 

그 후(後) 고부(姑婦)끼리 의(誼)좋게 협심노력(協心努力)한 결과 논밭 몇 마지기를 사들일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생활(生活)이 안정(安定)되니 일생(一生)을 병고(病苦)에 시달리다가 기세(棄世)하신 시부(媤父)님과 부군(夫君)이 불쌍하고 원통해서 기소(基所)에 석물(石物)을 올려 그 넋을 위로(慰勞)하고 명복(冥福)을 빌었다. 

김여사(金女史)의 어린 효행(孝行)을 보는 이마다 칭찬(稱讚)을 아끼지 않았으니 이 어찌 출천(出天)이 효부(孝婦)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시모(媤母)님도 작년(昨年)에 85세(歲)로 별세(別世)하시까지에 극진(極盡)히 효양(孝養)하였다. 

이와 같은 숨은 효행(孝行)이 널리 알려져서 1955년(年) 5월(月)에는 경북(慶北) 예천경찰서장(醴泉警察署長)으로부터 효부표창장(孝婦表彰狀)을 받게 되었고, 이어 김여사(金女史)의 선행사실(善行事實)은 널리 인정(認定)되어 1956년(年) 3월(月) 1일(日)에는 경상북도(慶尙北道)명륜회(明倫會) 예천군지부장(醴泉郡支部長)으로부터 선행표창장(善行表彰狀)을 받은 바 있음을 아울러 밝혀 둔다.